생일

병신년 유월 스무나흗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하얀원피스를 입었다
보랏빛 사발만한 수국코사지를 가슴에 훈장처럼 달았다

남천동 해변시장, 떡방에서 하나씩 포장된 모듬떡 50개와 식혜 두병을 찾았다
종이컵 50개, 프로방스에서 사온 꽃무늬 내프킨도 준비했다

동서고가에 차를 올려 학장램프로 빠져나가 강변도로를 달려
은빛 아침햇살을 받으며 몰운대 다대도서관으로 갔다

아침부터 푹푹 찐다

어제, 친정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내가 너를 낳던 날도 중복날이었다"
61년 만에 네 생일과 중복이 곁치는 걸보니,
그래서 환갑(還甲)인가보다고 축하말씀을 하신다

맞다!
나는 오늘, 6학년 1반 회갑을 맞이했다
누가 알아주던 모르던,
나는 내 나이가 자랑스럽다
그냥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너무 자랑스럽다

내가 '생각'이라는것을 하는 순간부터
나는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런 나에게 오늘 스스로 자신에게 상을 내려주고 싶다

<논어 에세이> 문학 수업반 문우들과
'건배'를 했다
혼자 감흥에 젖어 신나는데
35명 정원의 문우들이 더 흥기되어 기뻐하신다



이제, 나는
아름다운 화갑(花甲, 華甲)을 맞이하여
해질녘처럼, 그윽해지고 싶다
세상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옥탑방 별당 마님으로써
극성스럽게 아이들 살림에 참견하지 않고
동네 일에 원로인척 나서지 않고
조촐하게 차츰차츰 소멸하는 삶을 진행할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남항대교 북항대교 광안대교를 거쳐 신세계로 갔다
4층 아이스링크 옆 푸드마켓에 들러
'미역국 정식' 을 한상 받아, 우아하게 홀로 먹었다 (가격 6천원)

이 염천 더위에 어느 누가
나를 위해 따끈한 미역국을 끓여주겠는가
목젖이 뜨근한가 싶은데,
대책없이 물밀듯 쳐 올라오는 행복이 있다
주억거리며
식당안에 가득한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휴~ 휴~ '행복'을 다독였다


지하에 내려가 하얀 침대패드 두 장을 샀다
딸의 환갑을 위하여
서울에서 친정어머니와 동생내외가 함께
새로 이사한 부산 해운대의 뾰족탑에 오신다
드디어, 나를 낳고 기른 내 편이 오신다
외치고 싶다

"나도 내 편이 있다!"

* 친정 엄마는 늘 돈이 없으셨다.
딸이 친정에 가도 차비 한번을 내 손에 쥐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밥값이나 양말 한 짝은 어림도 없다.
그러던 엄마가
"내가 그동안 너에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며
그럭 저럭, 올해가 네 환갑이구나
너도 이제 나이가 들어
" 네몸 네가 알아서 돌볼 나이다" 며
올 봄에 "내가 돈을 좀 송금했다"라고 하신다

엄마의 수준으로 '좀'이려니 했다

통장을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0을 헤아려봐도

거금, '10000000'이다

기절할뻔 했다

나도 이 다음, 

우리엄마처럼 자식 환갑에 1천만원을 슬며시 송금할 수 있을까.
요즘 나의 뒷모습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어깨가 '으쓱' 조금 올라갔을 것이다

엄마에게 1천만원은 거의 전재산이다
못난 딸이 전재산만큼의 가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