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 2008년 5.6호 (통권 19)
박양근 교수가 쓴 <류창희 론>
류창희수필의 거듭 읽기:
『매실의 초례청』의 비평적 해체와 복원
박양근 (부경대 영문과교수, 문학평론가)
ykpark@pknu.ac.kr
초례청으로의 초대장
류창희 수필가는 누구인가. 그는 드문 이력의 작가이다.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논어를 가르치며 글을 쓰고 난을 치고 서예를 한다. 학예문(學藝文)을 섭렵한다랄까. 평자와 안면이 있다면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매실의 초례청>이라는 작품을 평한 적이 있을 뿐, 그 기억마저 의식의 산 너머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그 때 평자는 류창희의 수필이 언젠가는 문자향을 떨칠 것이라고 예감하였다. 매실즙을 만드는 과정을 신랑각시인 초야 치르기에 대입하면서도 격조 높은 문장과 질박한 어조라는 이중주로 엮어낸 솜씨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 매실즙이 익었는지, 마침내 47편의 수필이 독자를 위한 초례상 위에 차려졌다.
류창희 문학의 초석은 우선 녹녹하지 않은 격조를 지닌다. 어린 시절부터 “자~왈”의 분위기에 이끌렸던 만큼 수필마다 한학의 먹물이 배어있다. 고리타분한가. 그렇지 않다. 묵은 가지의 매화가 더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듯 그의 글은 동양적 감수성과 서구적인 분별성으로 직조되어 있다. 그리하여 다감한 감성을 겸비한 독자만이 『매실의 초례청』에 초대받을 수 있다.
작가의 역량은 무슨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있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세태를 셈하기보다 헤아리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작가는 남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다. 산사 기와가 아니라 “기와 위에서 자라는 세월의 싹”을 헤아리는 시선주기가 표의문자를 해독해온 습관에서 농익었기 때문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의 벗”으로서 수필독자를 위한 첫 서권(書卷)인『매실의 초례청』이 완성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알기위해서는 창작심리에 준거한 해체와 텍스트로의 재복원이 불가피하다.
피(血)의 그리움과 육(肉)의 뿌리 찾기
류창희의 수필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리움으로 꿰어진 주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그리움을 이미지화하면 청아한 달빛이고 고고한 현음에 해당한다. 그 썅겹이미지가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 <아버지의 방>일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방이 없다.”
이것은 <아버지의 방>의 첫 문장이다. 작가는 냉랭할 정도의 단호한 음성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선언한다. 그 없음은 육안으로 살핀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해석해낸 “비어있음” 이므로 찾으려 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빗금>이 등단작이고 <매실의 초례청>이 표제작일지라도 <아버지의 방>에서 더욱 깊은 울림이 번져나는 이유는 악기의 공명상자처럼 비어있기 때문이다. “하늘색 코로나 택시에서 내리는”아버지는 한 올의 연(緣)에 매어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일하는 남자, 가문을 세우는 가장, 자식을 지켜주는 부성과는 동떨어진 바람을 연상시켜준다. 독자는 주목할 것이다. 여기에 숨겨진 본질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이방인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아버지의 방에서 타인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첫 번째 해독하는 이유도 그 숨겨진 모습을 읽어내는 독자만이 류창희의 수필영토로 들어가는 패스포트를 발급받기 때문이다. 수필화자는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려 하지만 반응은 늘 “없다”이다. 소리 내어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호적등본에 이름은 올려져 있으나 실체가 없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눈을 마주친 기억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나의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는 혈육의 방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버지가 그립다. 온화한 마음으로 눈자위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아버지의 방’을 마련해 드리고 싶다. 아직 마음을 활짝 열어 따뜻한 방을 꾸밀 수야 없지만 그 방을 데울 장작개비를 모아보자. 속 좁은 소견머리로 생솔가지면 어떤가. 잘 타지 않아 매캐한 연기로 눈물이야 나겠지만, 자꾸자꾸 군불을 때다보면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날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방> 일부
부재의 회한이 정감의 수필을 잉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매실의 초례청>은 그리움의 울타리로 이루어진 문학적 정원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의 방>에서 태어난 <이월매조>와 <할머니의 축문(祝文)>과 <우담화의 제문(祭文)>은 3대에 걸쳐 전해오는 여성사이다. 여성이 주역이 된 세 작품은 여성이 거치는 비애와 품위와 아픔을 펼쳐내고 있다.
<이월매조>는 ‘평생을 술지게미와 겨겁데기’로 살아온 친정어머니에 대한 글이다. 썼다기 보다 각인되어 있다. 여성이 회상하는 친정어머니는 늘 잿빛이듯이, 그리고 “화투짝이 웬수였다.”는 단문이 어머니의 설움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듯 모녀는 “석삼년을 오지 않는 엄마의 임”을 함께 기다린다. “어쩌면 엄마와 딸이 읍내에 나가 곱슬거리는 불파마를 하고 가족사진 한 장쯤 박아서 아버지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는 고백처럼 작가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딸이다. 작가는 지금 남편과 두 아들이라는 세 남자를 주변에 두고 있지만 그들은 미적 묘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화투짝의 열두 그림에 담긴 희로애락에서 멀찍이 떨어진 삶을 보낸 어머니가 있어서다. 이 사실은 그리움이야말로 작가적 필수아미노산임을 밝혀주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작가는 어머니의 딸이므로 시어머니의 며느리임을 부단하게 자각하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류창희의 스승이다.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단발머리”의 촌티 나는 각시를 “풀꽃여인”으로 부활시켰다. <우담화의 제문>을 읽는다면 그 이유는 시어미에게 바쳐진 열녀 제문이어서가 아니라 변신이라는 문학적 모티프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씨, 말씨, 솜씨, 맵시의 부덕을 고루 다 갖추신 어머님은 “한 치의 어긋남도 못 본 척 넘기지 못하는 성품”이셨습니다. 불호령과 저기압전선을 만들어 며느리들의 기강을 바로 잡으셨지요. 어머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늘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며 마음의 보초를 섰습니다. 심신은 고단했지만 운명처럼 그렇게 어머님과 합이 척척 맞았습니다.
<우담화의 제문>일부
인간은 누구나 사표의 존재를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신앙적 대상이거나 촌수 높은 혈육일 수도 있다. 류창희는 시어머니를 “운명의 합”으로 삼는다. <우담화의 제문>은 죽은 자에 대한 예찬이면서도 고부의 만남, 동행, 사별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때문에 대상의 인품은 오히려 고양되어 간다. 꽃보살이라고 불리는 시어머니는 작가를 “어머님의 며느리”로 교육시키려한다. 등단작 <빗금>에서 “사는 방법도 세습인가”, “시댁은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처럼 “집안의 법도를 동심결 매듭”으로 풀어낸 은유는 그들이 고부간이기 보다는 인생의 사제 간이 되었음을 예증한다. “어머님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정성껏 살았다”는 자평처럼 시어머니는 “영원히 피어있는 우담화”이다. 이러한 존재의 모방은 제 5장의 표제작인 <댓돌위의 흰 고무신>에서 재현된다.
류창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리움은 항상 여성성으로 육화되어진다. 황토 마당 사이에 놓인 댓돌과 흰 고무신이 그 육화에 해당한다. 황토색과 흰색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시적 이미지가 완결된 부분을 살펴본다.
산사가 아니라도 좋다. 오두막의 방 한 칸이면 족하다. 그곳에 따뜻한 아랫목과 앉은뱅이 책상 하나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연필과 노트 그리고 강아지풀 한 줄기 꽂아 놓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여태까지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어떤 이력의 신을 신고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 신발 속의 낙엽들은 알고 있을까. 댓돌 위의 흰 고무신이 달빛에 곱다.
<댓돌위의 흰 고무신> 일부
사유의 공간으로서 이만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까.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는 잠시 잊도록 하자. 노승인들, 속세를 버린 비구니인들, 아니면 이름 없는 작가인들 어떤가. 자연은 누구든 와서 앉게 한다. 산사 같은 분위기와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구는 결코 과욕이 아니다. 작가가 꿈꾸는 세계는 이처럼 소박하다. 류창희의 수필론을 압축한 댓돌위의 흰 고무신이야말로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 초시간적 인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출생, 성장, 혼인이라는 평이한 소재가 어떻게 수필의 리얼리티를 지니게 되는가. 작가는 그 해답에 근접하고 있다. ‘아버지의 빈방’이 있었음으로 자신의 방이 있게 된 깨침이 그것일 것이다.
묵향과 문자향의 교합, 그 시적 변용
문학은 수면 아래에 비치는 바깥 풍경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수면에 있다. 수면에 파문이 이는가 아닌가, 탁한가 맑은가, 깊은가 얕은가에 따라 문학적 재현은 달라진다. 그림자가 실제 사물보다 아름다우려면 수면은 고화질의 스크린이어야 한다. 수필가가 부단하게 삶의 근원을 모색하려 하지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연유도 여기에 있다. 등단작 <빗금>은 그럼 점에서 삶의 문학적 승화를 보여주는 수작에 속한다. 그 미적 긴장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날마다 달력에 빗금을 친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어느 날은 한꺼번에 몰아서 일주일 단위로 칠 때도 있다. 이런 날은 죽죽 친다. 가볍게 지나간 날들이다.”
<빗금> 일부
위 단락은『매실의 초례청』을 여는 첫 문장 이상으로 작가의 삶과 글쓰기의 방식을 일러주는 언어들이다. 언어가 표방하는 빗금긋기에서 주목할 점은 “오늘이 지났다”라는 시간성에는 과거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긴장미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든 덫과 같은 “용납할 수 없는 고집”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편은 “문학의 텃밭”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대부분의 수필가들도 그러니까. 하지만 류창희의 특이성은 유희의 전시장으로서 문장이 아니라 “사유의 뜰”로 설정된 서사성에 있다. 작가가 마련한 사유의 뜰은 “별들의 고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집”들로 이루어진 길음동에서 시작하여 “글 한편처럼 살고 싶은 삶”의 출구로 나온다. 그 그리움을 체화한 수필이 <그리움은 수목처럼 번지고>다. 이 글은 “간식이 아닌 밥다운 글”을 바라는 작가의 수필론과 “그리움의 저울에 얹혀 산다”는 인생론을 수묵화의 서정으로 동시에 표현한 작품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움은 나에게 어떤 한 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 울컥울컥 그리움을 행간에 써 내려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 스스로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어루만진다. <그리움은 수묵처럼 번지고> 일부
그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지 않으면 편지를 쓰거나 하다못해 남의 글을 읽는다. 그는 문학이 무엇이라는 현학에서 벗어나 글을 씀으로써 글의 영토를 확장해 간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묵향 그윽한 글 한편”이라는 절대적 향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일 수필에 예(禮)와 도(道)라는 명분이 있어야한다면, 류창희의 수필집은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 도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해온 중국문학이며 예는 시어머니의 며느리로써 익힌 서예와 난치기일 것이다. 류창희는 이러한 엄격한 생활을 문학과 예술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행복한 문인이다. 그 대표작인 <초사란>(焦思蘭)은 꼿꼿한 난을 통해 자존심을 지켜온 자신의 삶을 풀이한다. 여고 시절에는 풍지박살난을 만들까 숨을 가다듬었고, 민중의 삶을 살아온 작가로부터는 표연란(飄然蘭)의 기개를 배웠고 초로의 학우인 수녀에게서는 온란을, 결혼 후에는 안절부절란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고 읊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학난도 표연란도 온란도 나에겐 멀기만 하다”고 고백할지라도 “절벽에서 내리 꽂이는 획”같은 삶을 이어오고 있다.
모든 일이 “붓끝이나 손끝이 아니라 열린 마음에 있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난치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예화(禮化)이다. 그 품격이 전이된 완성작이 <매실의 초례청>이다. 매실의 제조과정과 초례라는 토속적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이작품은 격과 흥이 조화를 이룬 낯설기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좋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니, 마지막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매실의 초례청> 일부
<매실의 초례청>에는 풍요의 상징이 넘쳐난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출산과 다산, “검은 천”은 초야의 어둠을, “초가지붕의 하얀 박 넝쿨”은 육감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초야의 합방과 음양의 조화를 전달하는 어조는 향토적 흥취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이고~! 별꼴 다 보겠네. 매실에 무슨 수줍음이 있능겨.”라는 능청 때문에 “환한 대낮에 길거리로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살자”라는 짓물러 터진 부부애의 리얼리티는 미감의 언어로 순화되어 진다.
성정(性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이 조건을 인정하기 때문에 화자는 매화시와 저잣거리의 속언을 병치시키고 남녀 간의 성(性)을 매실과 설탕의 교(交)로 치환시켜 내었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지 않은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매실의 초례청> 일부
매실이 설탕과 합방하기 위해서는 고결한 시나 고담준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때로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다. 사랑의 진리도 오고 가는 냉혹한 세월에 실리고 홀로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수필에도 조금의 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생태계에서 펼쳐내는 어울림의 행위는 차라리 제 생긴 대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현실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매실의 초례청>은 성의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하면서도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물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떤 수필이 되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궁하면 통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심연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희망의 출구는 가까워진다. 예술과 문학도 마찬가지다. 절망으로 빚어낸 작품일수록, 더욱 밝은 빛을 낸다. 만일 류창희의 문학적 귀착점을 찾으려 한다면 그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한 삼태기의 흙>속에 있다.
한 삼태기의 흙을 포기하려 했던 자신의 몽매함이 설움처럼 토해져 목이 쉬도록 통곡을 했다. 아마 그때 그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울 일이 없어 드디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나마 어렵사리 고전을 계속해서 읽을 수 있는 청복(凊福)은 그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삼태기의 흙>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면 미래를 포기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닦달하여 재생의 에너지를 되찾는다. 작가가 좌절의 기로에서 찾아낸 화두는 “위산일궤(爲山一簣)”라는 고어이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만들지 못한다면 문학적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태만도 자신에게 있다. 그것을 깨달은 작가는 통곡을 터뜨린다. 꽃조차 고통 없이 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작가가 류창희이다.
새로운 이데아를 향하여, 탈주와 변신의 욕망
문학의 주체는 작가이고 객체는 대상이며 매체는 언어다. 정신적 순례자로서 작가는 미적구조를 구축하여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려 한다. 자기표현의 욕망이야말로 존재의 의미라는 뜻이다. 글쓰기의 과정을 추적하면 먼저 작가의식이 갖추어지고 작품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독자와의 공명의식이 깔려지면 언어의 영토로 진입하게 된다. 숨은 진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수필론을 류창희의 작가세계에 적용하면 그의 언어 행위는 최적의 스타일을 생성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가 인물들의 행위에서 행동을, 사물에 대한 지각에서 자각을, 사건에 대한 인상에서 상상을 떼어내기 위해 언어를 교직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글쓰기 과정을 언어공학이라고 부른다.
류창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그의 영토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요약하면 류창희는 하루하루를 빗금으로 지웠다, 이제 <빗금>에서 그어졌던 빗금은 <발한>(發汗)에 다다라 새로운 언어로 변환되어 간다.
나만 보는 탁상용 달력이 있다. 한 달 단위로 새로운 표어를 정해 써 놓는다. 잘 지켜졌나를 확인한 적은 없다. 수많은 단어들이 달마다 적혀 있다.
‘내 마음과 같이’‘선택한 가난’‘어두운 밤하늘에 드문드문 빛나는 별처럼’ 이라고 적어놓은 글들은 주로 나를 단속하는 내용들이다. <발한(發汗)> 일부
빗금이라는 부호가 “표어”라는 담론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녀는 “시멘트 담 밑에서도 뿌리만 내리면 방긋 웃는 노란 민들레꽃”다. 동시에 “무서운 며느리”이고 해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속이라고는 없는 년”이기도 하다. 외향과 실제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색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든 것을 말해야한다, 화를 내야한다 삿대질을 하며 싸워야 한다.” 는 다짐을 하지만 그녀는 “방에서는 혼자 가슴을 눌러가며 속울음”을 운다. 이러한 모순을 지닌 작가만이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깃발이 달린 영토를 지켜낼 수 있다.
다시 류창희의 문학에서 삶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삶으로의 회귀는 당연히 부성의 부재를 극복하려는 잠재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어머니가 된 작가는 아들의 취향과 소질을 최대로 존중하려고 한다. 어쩌면 아들조차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더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 <바람은 감각이다>이며 <너도 풀꽃과>는 그 추이를 더욱 진행시킨 작품이다. 들꽃을 좋아하는 작가는 “양지꽃, 제비꽃처럼 작은 풀꽃들을 보면 한두 송이 뜯어다 아이 방에 꽂아 준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문학적 영토에서 꿈꾸는 존재성을 자식에게 불어넣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무기를 버리다>는 해체된 여성의 역할과 변신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주부의 고유역할은 가족에게 밥을 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신성한 의무이면서 가족을 지배하는 수단이 기도하다. 그 역시 시류를 거역할 수 없다. 결국 “내 밥 먹기 싫은 사람 다 나가.”라는 불만을 터뜨리지만 사실은 외식 문화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신자아를 확립하려는 내성의 외침이 아닌가.
얼마 전까지 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무기는 기능을 잃고 장난감만도 못한 무딘 잔소리로 전락하였다. 어느 여름방학 한 달이나 집을 비웠었는데 아이들은 어미를 찾기는커녕 살이 통통 쪄서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서운한 말을 했다. <무기를 버리다> 일부
한 달 동안 집안을 비워도 “아이들의 살이 통통했다.” 예상 밖의 결과를 맞이한 작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음식 만들기라는 무기를 포기하여야 했다. 이 시점에는 절묘한 반전이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무기를 버림으로써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꿈꾸어 왔던 “밥 하는 엄마가 아닌 우아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루 세끼 식사가 면제된 공간과 우아한 여류문인은 모든 여성이 꿈꾸는 이상향과 이상형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마술 같은 탈바꿈을 얻기 위해 “하루 일을 점검하는 빗금치기”를 그만 둘 수 없다. 왜 그런가.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방이 없었으므로 자식의 가슴에 어머니의 방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하늘색 코로나 택시에서 내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유일한 부성의 끈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너도 풀꽃과>에서 서술하듯이 아이 방에 들꽃을 꽂아준다. 아들이 간직한 작은 상자 속에서 산책길에 꽂아 주었던 풀꽃들을 발견했을 때 작가는 “한참을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다. 정이란 추상적 그리움만이 아니다. 언술만으로는 목마르고 허기지다. 그리하여 “어찌 나에게 문학 수업이 따로 있겠는가?”라고 자문자답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류창희만의 질문인가.
닫으며
수필은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언어라는 측면에서 수필을 해석하면 자유로운 표현의 영토로 나아가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하다. 들뢰즈는 “예술작품은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탈주선을 타는 언어의 항해자들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작가만이 수필을 문학답게 만들어간다.
이러한 문학적 담론을 우리는 류창희의 『매실의 초례청』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그가 서문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이라고 고백할 때의 그리움의 대상은 혈과 육, 그리고 삶을 거처 언어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한 변신의 과정이야말로 작가의 수필을 설명하는 담론일 것이다. 빗금으로 삶을 표백하고 호미질로 글로 표방하는 일은 수필가라면 누구나 행하여야 할 직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좌표에 얹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매실의 초례청』이 성찰과 사유로 가꾸어진 영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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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근(부경대학교 영문학과 교수)평
류창희의 《매실의 초례청》
지난 1/2월호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으로는 <매실의 초례청>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낯설게 하기를 실험한 점에서 관심을 끈다. 매실즙의 제조과정에 초례라는 토속적 에로티시즘을 도입한 서두가 인식의 새 지평을 연 것이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니, 마지막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동 367)
위 단락에는 풍요의 상징이 넘쳐난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출산과 다산을 의미한다. 청실홍실과 초야의 합방은 서구적 에로티시즘보다는 동양적 성애를 연상시키면서 풍요의 설화로 발전된다. 주목할 점은 화자의 수줍었던 초례가 체험의 형성화에 한 몫을 한다는 점이다. “온몸을 감싸 안았던 수줍음”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서화詩書畵라는 예기로 승화되고, 음양의 조화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어투는 향토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하이고~! 별꼴 다 보겠네. 매실에 무슨 수줍음이 있는겨.” 이 능청스러움 때문에 “환한 대낮에 길거리로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살자.”라는 짓물러터진 부부애와 조응을 이루게 되었다.
성정性情은 가장 인간적인 본성에 속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격조있는 매화시 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의 속언에 함축되어진다. 막된 사랑가가 속되지 않는다면 남녀의 성性을 매실과 설탕의 교交로 치환시켰기 때문이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지 않은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동 369)
매실이 설탕과 제대로 합방하기 위해서는 고결한 매화시 따위는 필요하지않다. 고담준론은 겉멋에 불과하다. 매실과 설탕을 두터운 비닐에 함께 넣고 발길질로 걷어차야 맛 좋은 매실즙이 만들어진다. 생태계에서 펼쳐지는 어울림의 행위에서는 제 생긴 대로 다루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필쓰기도 소재와 주제 사이의 초례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글이 더 나으리라. 작가의 변증법적 논리가 적절했다.
수필에서 성은 다루기 힘든 소재에 속한다. 그 현실에서 <매실의 초례청>은 성의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했다. 그럼에도 매화라는 기품있는 이미지 덕분에 작품은 문학성을 확보하였다. 사물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떤 수필이 되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수필과 비평 2004년 3/4월호》
<여송한자방>과 다움 네이버 까페에 실린글
《매실의 초례청》 류창희 수필집 에세이문학출판부
Soogoo Ahn님|2008.05.01 책 읽은기간 13일 | 10 |0
春野[춘야] 선생님의 수필집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초례를 거친 매실처럼 알알이 그 진액이 녹아 감칠맛을 더합니다.
그 속에 소박한 삶이 있고 인고의 강인함이 있으며 아련한 추억이 맴돌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는 다 다르지만 책 속으로 들어가면 애틋한 꿈이 있고
향내 나는 들판이 있으며 마음껏 날아다니는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단숨에 다 읽어 버리기가 아까워 게으름을 피우며 보고 또 봅니다.
백합의 고운 자태가 눈에 아른거립니다.
화사하지는 않더라도 너무나 아련한 그리움이 배어나옵니다.
마디마다 절제된 카타르시스에 잠깐씩 숨을 멈추기도 합니다.
저 멀리 내 쉬는 숨소리 하나하나에 나도 숨이 턱 막힙니다.
여러분을 이 만남에 초대하오니
함께하시어 데이트를 즐기시면 기분이 상큼해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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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독서아카데미> 까페와 다움과 네이버 검색에 실린 글
도서명 : 매실의 초례청
저 자 : 류 창 희
출판사 : 에세이문학출판부
출판일 : 2008년 1월
정 가 :10,000원
그리움은 恨이 되고, 그 恨은 아름다움이 되었네.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날 정도로, 2008년 1월 중순의 겨울 날씨는 따뜻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따뜻한 겨울에 방심하던 중, 갑작스레 찾아온 동장군의 호령과, 모처럼 만에 흩날리는 눈에 다들 당황해하고
어수선을 떨던 때였다. 서울에서 내리는 눈은 雪雪 거리며 내렸고, 그 눈은 차들을 설설거리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나의 터전인 부산에서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진눈깨비가 흩날렸는데, 이것도 눈이라고 사람들은 좋아서 부산을 떠니,
그래서 부산인 것이리라.
항상 늦기만 한 퇴근 이후, 잠들기 전 습관처럼 펼쳐드는 책에서 일말의 기쁨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에, 류창희 선생의
수필집을 펼쳐 들고서는 읽기 시작하였다. 초반 몇 몇의 에피소드를 지나면서, 책을 덮고 잠깐 멈추었다가 읽고,
또 멈추었다가 다시 읽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는데, 그것은 이렇게 추운 겨울날 두꺼운 이불을 덮어쓰고 따뜻한 구들장에
누워서 읽는 책이 아니라, 포근한 봄날의 햇살과 기운을 마음껏 받으면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수필집이라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였기에 그런 것 이었다.
즉, 글 곳곳에서 봄의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이러한 느낌은 본문 중에 나오는 저자의 여러 호(號) 중에서도 ‘春野’ (봄의 뜰,
봄의 들판이 아니다) 라는 호로 가장 많이 불리어 졌다는 내용에서 나의 느낌이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이전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였었는데, 그 때는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코 끝에서
녹차향이 느껴지더니, 계속 읽어 나갈수록 법당에서 정성스레 사루는 향(香)내음이 느껴졌었다. 이 때의 느낌을 서평으로
적어 놓았었다.)
한편으로, 글 속에는 우리네 삶에서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恨의 정서가, 읽는 내내 가슴 시리도록 다가왔는데, 류창희 선생이 살아오신 즐거운 추억과 아쉬웠던 순간들, 때로는 힘들었던 순간들이 바로 엊그제의 일들처럼 선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그러한 것들은 그리움이며, 그리움은 자신에게 어떤 恨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러한 기억들에
집착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나간 것에 감사하며, 모든 기억들을(기억 자체가 恨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리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애틋한 글들은, 바르고 이쁘게 살아오신 저자의 삶 만큼이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고, 평안함을 주고 있다.
이 땅의 아름다운 시어(詩語)에 욕심을 낸 하늘의 선녀가 있었다. 그 선녀는 아름다운 시어들만을 골라, 할머니의 누에가
뽑아낸 실로 만든 비단 주머니에 시어들을 가득 채우고서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가득찬 시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비단 주머니는 터져 버리고, 그 안에 있던 아름다운 시어들은 여기 저기 흩뿌려졌다.
여기 저기 흩뿌려져서 반짝이는, 절제된 시어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글 곳곳에서 찾아내어 음미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촌철살인과 같은 절제된 문장의 미학이 어디 일본의 하이꾸(俳句)에만 있으랴.
008.01.22 세속도시
花樣年華 어찌 하오리까. 이 북받치는 감동을.... 미천한 글를 쓴 사람에게 이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겠는가.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둥둥거림.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않아 가슴에 묻어야겠군요. 08.01.22 09:21
세속도시 화양연화님 글이 미천하시면 다른 글들은..^^;; 가슴에 묻어두시면 다시 그리움이되고 한이되고 아름다움이 되시겠네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만드시는 연금술사이십니다..^^* 08.01.23 07:13
花樣年華 눈이 온다기에 함박눈 한번 맞아 보려고 서울에 왔더니 '어제 내린 눈 오늘 앞길만 질척이게 한다' 더니, 나의 첫사랑처럼 마음만 질척이게 하는군요. 네이버 책 검색에 '리뷰' 또 감동 감동. 지속태 유지할만한 저력이 있어야 할텐데 .... 감사합니다. 08.01.24 08:25
하늘마음 "부럽습니다. /오가는 마음밭이, /감동이네요." //....??? 08.01.22 19:31
세속도시 여기 카페에는 어쩜 이리도 이쁜 대화명이 많으신지..보는 제가 넉넉한 마음이 절로 납니다..^^ 08.01.23 07:15
토마스 아퀴나스 <BSKS2> 까페에 실린 글
류창희 님의 『매실의 초례청』.
이 수필집을 읽으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는 우울한 샹송과 멜랑꼴리한
우수의 그림자가 한여름의 벼락처럼 도망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통해 나 자신이 더 밝아지고 맑아지고 착해졌으면 합니다. 임의 글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예감합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이 수필집을 별이 초롱초롱한 한 밤중에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읽을 때만은 낙동강 변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글은 왜 씁니까? 영혼이 고독해서 입니까? 등산가는 자기 영혼이
고독할 때 산에 오릅니다. 그렇다면, 수필가가 자기 영혼이 고독할 때 그 고독한
영혼의 눈으로 포착한 대상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의 임무인 동시에 최고의 문화행위입니다.
임은 벌써 그것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