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내가 객골 분교 소사로 근무할 때의 체험담 하나를 들려주겠다.
나는 교육대학을 중퇴한 경력의 소유자다. 만약 제대로 졸업을 했더라면 이 선생으로 불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중퇴를 하는 바람에 시골 초등학교 분교의 고용인으로 취직을 해서 이 씨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교생 17명. 월평균 출석률 3일. 주민들 전부가 화전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아낸 사실이지만, 그들의 뿌리 깊은 불신은 이른바 배운 놈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배운 놈은 적이었고. 배운 놈은 절대로 믿을 놈이 아니었다. 그들은 배운 놈한테 속아서 패가망신을 했고 결국 첩첩산중에 들어와 화전민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골수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대인기피증이나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들끼리도 믿지 못해서 오 리 건너 한 채씩 집을 짓고 살아갈 정도였다.
이십여 가구 중에서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학부형이 딱 세 명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나는 인생에서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적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오 리 건너 한 채씩 분산되어 있는 집들을 돌아다니며 가정교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부형들은 그것조차 싫어했다. 국어는 읽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편지 정도만 읽으면 된다. 답장은 쓰지 않아도 된다. 산수는 거스름돈만 제대로 받으면 된다. 제발 나타나지 마라. 화전민으로 사는 주제에 공부는 무슨 놈의 공부냐. 공부를 할 시간이 있으면 화전밭 한 고량을 더 파게 만들겠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학부형들의 눈총을 받으면서고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개구리를 잡는 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는 아이가 있었다. 그곳 아이들은 가을까지 마른버짐이 핀 얼굴로 살아가다가 신기하게도 겨울만 되면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겨울철이 되면 개구리로 영양보충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녀석은 4학년이었다. 이따금 매미채와 지렛대와 양동이를 들고 학교에 나타났다. 개구리를 잡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개울로 가면 녀석은 개구리라가 들어 있은 돌을 선택한다. 그리고 매미채를 갖다 댈 장소도 선택한다. 녀석이 지렛대로 돌을 움직이면 개구리가 튀어 나와 매미채 속으로 들어간다. 백발백중이다. 한 번도 허탕을 친 적이 없다.
나는 궁금했다. 개구리가 들어 있는 돌과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방향을 정확하게 간파하는 비법이 무엇일까. 나는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녀석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딱 보면 알아요.
나는 그것이 사물과의 일체감에서 얻어진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딱 보면 아는 경지를 말이나 글로 전달할 수 없다. 심안에 비치는 것들은 심안으로만 전달된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 중에서


류창희   2009-01-30 11:52:39
'딱 보면 아는 경지'
그 '감'
'자득의 경지' 그 곳을 향하여~!
가을여자   2009-01-30 13:16:42
척하면 삼천리
쿵하면 짝
도사가 된다는 것
그 경지 도달하려면 ...
도 닦아야지요.
류창희   2009-01-31 16:53:52
가을여자님
차분해야 도도 닦아지는데
겨울잠이 사람을 늘어지게 하는 것 같아요.
걷기 운동이라도 해야할텐데...
자꾸 TV 앞에 앉거나 침대에 눕거나...
겨울을 길게 누리고 있답니다^^*




이외수 (李外秀)

독특한 상상력, 기발한 언어유희로 사라져가는 감성을 되찾아주는 작가 이외수.
특유의 괴벽으로 바보 같은 천재, 광인 같은 기인으로 명명되며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문학의 세계를 구축해온 예술가



공중부양에 대한 일화

몇 년 전에 남양주에 살고 있는 후배 소설가 하나가 평소 친하게 지낸다는 동네 꼬마 하나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이학년쯤으로 보이는 꼬마였다. 나는 꼬마에게 독자사랑방 겨외선당(格外仙堂)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돌아갈 무렵 꼬마가 내게 그림을 하나 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심성이 착해서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후배 소설가는 그러면 안 된다고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타일렀지만 꼬마는 전혀 개의치 않고 눈물까지 찔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후배 소설가의 난처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먹으로 동자 하나를 그려서 꼬마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후배 소설가가 다시 우리 집을 방문해서 꼬마에 대한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문을 여니 꼬마가 숨이 턱에 차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고 소리치더라는 것이었다.
“테, 텔레비전을 틀어보세요. 저, 저한테 그림을 그려준 하, 할아버지가 지, 지금 텔레비전에 나와요.”
꼬마의 얼굴은 놀라움과 환희에 충만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어떤 텔레비전 교양프로에 잠깐 출연했던 사실을 언급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꼬마의 다음 말이 가관이었다.

“그 할아버지 이제 떴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꼬마가 말하는 ‘떴어요’ 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때 공중부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날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류창희   2008-11-29 18:39:53
어미에게
3분의 시간도 인색한 큰놈이

"엄마 이 책 보세요"

3초만에 내 앞에 내밀고
또 어디론가 가버렸다.
'도깨비 같은 놈'
이놈도 어느 날 '공중부양' 할 것이다.
호수아빠   2008-12-01 17:50:32
이외수의 '하악하악'을 읽고 '카악카악'거렸는데....소설가 이외수는 요즘 라디오 프로그램 언중유골 dj로 정말 공중부양 했지요.
류창희   2008-12-01 21:03:52
그러게. 만약 이외수 옆에 있다하면
난 가까히 다가가지 않을 듯 한데
멀리 있으니 참 멋지네.

취향 독특한 사람들
희한한 사람들
'공중부양' 하고

며칠전 영종오빠가 대용량메일 보내왔는데
무진장 '공중부양'을 꿈꾸던데
다 우리가 하고 싶은 우리들 이야기더군.

무성 영화
정호경

결국 낙향하고 말았지만, 처자를 거느린 지 십년이 넘도록 남의 집 신세로 세월을 보낸 그 친구 집에 놀러 갔었다. 주인 방 바로 옆에 딸린 단칸 셋방살이였다. 얘기하는 우리들 옆에서 그 친구의 어린놈들이 뭔가 조심스럽게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후다닥하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밖으로 튀었다. 나머지 한 놈은 뒤로 약간 넘어진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웃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셋방살이를 오래하다 보니 애들이 저 모양으로 되어버렸네.”
쓸쓸히 웃음을 지으며 내뱉는 친구의 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가설극장에서 본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했다.


정호경

수필집 :
까마귀야 까마귀야 (1994) 고려출판사
오늘같이 즐거운 날 (2000) 교음사
폐선 (2002) 다빈치
낭패기 (2007) 좋은수필사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한문화 2000년

글쓰기를 통해 삶이 끝나는 날까지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인 훈련

내 가족에 대해 쓰기 시작. 내 가족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도 내가 틀렸다고 말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 세상에서 내 가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실천적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충실하게 살겠다는 뜻

* 초심자의 마음, 종이와 연필
두달 전에 꽤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는 법.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
필기구를 마련해야한다. 생각은 손이 움직이는 것보다 언제나 앞서 달려가기 때문.
종이는 글 쓰는 이에게 더없이 중요한 장비.
감정적인 글을 쓸 때는 처음에는 직접 손으로 쓴다. 손으로 쓰는 것이 심장의 운동과 더욱 가깝게 연결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첫 생각과 만나서 거기서부터 글을 퍼낼 때 당신은 싸움에 나선 전사가 된다..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글을 쓰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적이 있다. 글을 쓰면서 눈물을 흘리는 적도 있다. 그래도 계속 써야한다. 자신의 감정에 마멸되지 않아야 진실을 파고들 수 있다.
손을 계속 움직여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편집하려 들지 말라. 그대로 밀고 나라라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첫 생각에 활활 불을 붙여주는 것, 사회적 체면 또는 내면의 검열관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내면의 에너지원에 도달하는 것, 피상적으로 우리가 느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
첫 생각이란 무엇인가. 마음에서 가장 먼저 ‘번쩍’ 하고 빛을 내는 불씨이다. 이 불씨의 뿌리는 엄청남 에너지를 가진 잠재력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불씨는 대개 우리 내부의 검열관에 의해 진화되어 버린다.

*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진짜 중요한 것은 작품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글쓰기 삶쓰기)
글쓰기 훈련은 몸을 데우는 워밍업 단계
훈련은 공연에 앞서 무용수가 몸을 풀고, 시합 전 육상선수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과 똑같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도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 말라.

* 예술적인 안정성을 얻는 과정
습작시절 엉클어진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안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바깥에서부터 쏟아지는 비평도 무섭지 않다.

* 습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묶어보자
평소 쓰고 싶은 주제가 떠오를 때마다 아이디어를 적어 두는 노트를 따로 마련해 두다. 단 한 줄 짜리 짧은 글일 수도 있다.
삶의 재료를 삭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통해 비료를 먹고, 태양열을 빨아들여 점점 무성하고 진한 초록 잎을 지닌 식물로 자랄 준비를.

* 나태함과의 싸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주일 후 작품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해라. 보여주기 위해 무언가 쓰지 않으면 안 되게.
한 달에 노트한권은 채우도록 애쓴다. 글의 질은 따지지 않고 순전히 양만으로 내 직무를 판단. 무조건 노트 한 권을 채우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어떤 글이든 언제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치열)

* 내 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 공부가 부족해서 자신이 쓴 글이 증명하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말라. 내 마음이 그 들판 속으로 영원히 산책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내면의 잠재능력에 가닿아라
재능과 능력은 훈련을 거쳐 가면서 커지는 법.
글쓰기를 배운답시고 쓸데없이 대가들과 문학 강의를 좇아 철새처럼 옮겨 다니지 말라.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자신의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자.

* 논리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수용하라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다른 하나를 볼 수 있는 폭넓고 열린 시각을 가져와 한다.

* 강박증의 힘을 이용하라
작가란 종국에는 자신의 강박증을 쓰게 되어있다. 나를 괴롭히는 강박증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은 직접 글을 써서 풀어내야 한다.

* 세부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라
글쓰기에서 우리가 살았던 장소와 그 공간을 채우던 사물들의 이름을 불러 주고 그것을 우리 삶의 세부사항으로서 써 내려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작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의 작은 부분들마저도 역사적인 것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세부묘사는 우리가 만나는 세상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고 기억하는 것과 같다.

*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
작가는 남들보다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하게 검토. 삶을 이루고 있는 재질과 세부 사항을 들여다본다.
돈을 버는 일보다 글을 쓰기 위해 바보가 되는 것도 무릅쓰는 인생.
시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땅과 같은 것.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내 마음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있다.

*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 말하지 말고 보여 달라
내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독자의 손을 잡고 슬픔과 기쁨의 골짜기로 끌어가야 한다.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은 절대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이야기에 당신만의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확인하라는 뜻.

* 그냥 꽃이 아니라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라
‘창문가의 꽃’이 아니라 ‘창문가의 제라늄’.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휠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을 쓰라

* 몰입이 주는 깨달음
글쓰기 속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몰입이어야 한다.

*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이야기꾼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나간다.
당신이 수없이 말했던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라. 그것으로 글쓰기의 많은 부분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 동물적인 감각으로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도 당신은 작가이다.
동물처럼 내가 쓰려는 이야기의 먹잇감들을 하나씩 비축해 두자
작가는 요리를 하고 있건, 잠을 자건, 산책을 하건 언제나 작가이다.
지나가는 거리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면 절대 길을 잃는 법은 없다. 사이사이 ‘덩샤오핑’

* 자기 마음을 믿어라
어쩌면, 아마도, 아무튼 부정형의 수식어, 글쎄~ ‘이것은 푸른 말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라

*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이는 법
글쓰기 좋은 장소를 선별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오히려 당신을 혼자가 될 수 있게 해준다.

* 작업실에 대하여
글을 쓸 공간을 구할 생각이라면, 그야말로 방 하나만 구하라. 그 방이 비가 새지 않고, 창이 하나 있고 겨울철 난방만 된다면 그만이다.
더 이상 손 볼 데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에 앉아서 이 사실을 애써 잊으려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순례하라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쓰는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단순한 존재이지만 특별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줌.
평범한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라. 이 목록에 들어있는 것들을 단 한번이라도 언급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 의심은 고문이다
설령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출판되지 않더라도 도 다른 글을 다시 또 쓰라.

*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다.
글쓰기는 나의 친구이다. 글쓰기는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는다. 내기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버릴 수는 있어도 글쓰기가 나를 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

* 너와 나를 관통하는 글쓰기
우리에게는 그냥 살아가는 우리 삶이 있다. 우리는 그냥 글을 쓰고 싶은 것이며, 그냥 비와 식탁과 음악과 종이컵과 소나무를 만지고 싶은 것이다.

* 작가로서 살아남는 길
종이에는 멋진 시를 적지만…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근사한 것이긴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라
일본에는 뛰어난 하이쿠를 적은 종이를 병에 담아 강이나 가까이 있는 개울에 띄어 보내는 멋진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작가에게 자기가 만들어 낸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아주 심원한 본보기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 시간이 작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매일 글을 쓰라.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단지 규칙에 맞추기 위해 엄청남 노력을 쏟는 것처럼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는 없다.
일주일 멀게는 1년이 되어도 좋으니 글쓰기에서 떨어져 있으라.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리라.

*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글쓰기는 숨을 쉬는 것과 똑같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숨쉬기를 잊어버릴  순 없다.

* 사무라이가 되어 글을 쓰라
만약 그 글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 버려도 좋다.



류창희   2008-11-10 15:31:18
이런 저런 곳에서
원고청탁이나 혹은, 수필론에 대하여
이야기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젠 더 이상 궁지에 몰릴 여지가 없다.

등단하기 전 읽었던 책을 다시 뒤적이며
초심의 마음으로 ...

'반성'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도
이젠, 염치가 없다.
호미   2008-11-11 17:29:46
오래 전에........
글을 쓰는 이들이 쏟아내는 아픔이 부러워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명령어의 책을 샀었습니다.
밑줄 좌~악 그어가며 읽은 책을 덮어두곤,
저는 기냥 논어가 좋아서 드러누눴습니다려....
푸른솔   2008-11-12 11:17:09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해야겠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
좋은책을 소개해주어 감사합니다.
류샘 잘계시죠.
항상 일상에 부지런함으로 사는
류샘이 부럽습니다.
류창희   2008-11-12 20:59:46
푸른 솔님^^
'오죽하면 여북하다'는 말이 있지요.
뼛속까지 반성중이랍니다.
일상이 한가해야
사색이 깃들거늘....
류창희   2008-11-12 22:28:36
호미님
호미선배님도 '너도풀꽃과'이십니다.
틈틈이 습작하세요.

2001년 제가 등단패 받던 날,
저를 아끼는 어느 선생님께서
"류선생! 문학을 하려면 '논어' 를 읽어"
그날 이후,
논어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호미님 글을 보니
문뜩,
작년에 돌아가신 '이동영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제가 올해 책 낸걸 아셨다면,
또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요.

보답하는 길은 좋은 글 써야하는데...



송혜영 hisong999@hanmail.net

휴전 협정 3년 후, 경남 울주군 언양면의 한미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울산에서 유년기를 보냄.
초등학교 입학무렵 상경, 죽 서울서 버티다 얼마 전부터 홍천강변의 누옥에서 묵새기고 있슴.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로 제도권 교육을 마감함
십수년간 소일하던 얼치기 화가 노릇을 접고 2004년 '현대수필'로 등단, 오늘에 이름.


그 여자의 말뚝 


   딱따구리가 야무지게 나무를 찍는 것 같은 소리에 잠이 깼다. 잠자리를 걷고 일어나려는데 ‘딱 딱’ 오금을 박는 목소리가 다시 아침 공기를 갈랐다. 그녀가 돌아왔나보다. 논에 모도 얼추 자리를 잡았고, 한 숨 돌리는 참에 서울 다녀온다며 나섰는데 좀 지체한 게 화근이었다. 그동안 채마밭은 풀이 무성하고 제때 옮겨 심지 않은 들깨는 누렇게 부황이 들어있었다. 이틀 내린 빗밑인데도 물꼬를 제대로 터주지 않은 게 더 부아를 돋운 것 같았다.
“ 들깨 좀 옮겨 심으면 어디가 덧나나.”
“ 풀은 키워 내다 팔겨.”
  그녀는 논으로, 텃밭으로, 뒤꼍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말총을 쏘아 댔다. 응사가 없는 걸 보니 그녀의 표적은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래도 난사된 총알이 퍽퍽 깨밭에 박히고, 밤나무를 관통하고, 우리 집 마당에도 유탄이 날아왔다. 담장 너머로 밭에서 잠시 허리를 편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흙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엄지부터 차례로 꼽아가며 아들 딸 집으로 휘돌아 온 그간의 바쁜 일정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종내는 남편 흉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아, 그래 좀 늦었더니 죄 엉망이야. 저 들깨 꼴 좀 봐. 내 없는 새 옮겨 심었으면 오죽이나 좋아.”
그쯤에서 그의 역성을 들어주어야할 것 같아 한 마디 거들었다.
“ 아저씨도 그냥 놀지 않으셨어요. 논으로 밭으로 꽤 바쁘신 것 같던데…….”
“ 분주다사지 뭐. 그 양반은 그냥 말뚝건달이야.”
“ 네? 무슨 도사라고요. 말뚝이는 또 뭐예요.”
“ 아니 분주다사(奔走多事).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바쁘기만 하다고. 실속도 없이.”
  우리는 웃고 말았다.
  그녀가 오고 사흘도 안돼 모살이가 좋아지고, 텃밭도 예전의 활기를 찾았다.  밭고랑을 메운 풀이 머리채가 잡혀 끌려나오고, 들깨가 널찍하게 새 자리를 찾아들었다. 시난고난하던 파도 빳빳하게 일어났다. 그에 비해 연일 집중포화를 맞은 그녀의 말뚝은 혼자 왔다 갔다 하던 때보다 표 나게 풀이 죽었다.
  평균치에 훨씬 못 미치는 체구의 그녀는 어디 한군데 진득이 살 붙은 데라곤 없다. 그건 워낙 몸이 재바른 그녀에게 살이 붙어있을 새가 없어서다. 그녀는 땡볕을 무서워하지 않고 논밭을 돌보고 틈틈이 품도 팔고, 도로 공사 현장에도 나간다. 남의 밭에서, 자기 논에서, 장독대에서 수시로 출몰하며 가공할 노동량을 소화하는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녀의 경이로운 노동이 없었다면 자식 공부시키고 집칸이라도 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그녀의 ‘말뚝 건달’은 도대체 뭐하냐고? 그로 말하자면 동네 최고의 인텔리겐치아이면서 로맨티시스트이다. 그는 나름대로 화려했던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거나 시국을 개탄하느라 집일은 뒷전이다. 집 앞에 내놓은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 개미귀신이 연상된다. 파라솔 그늘에 숨어 마치 사람이 굴러들어오길 기다리는 것 같아서다. 바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은 그 집 앞을 지날 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잠깐 곁을 주면 커피 한 잔 곁들여 길고 지루한 시국 강연을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긴 옹색한 땅(수로 옆이나 포장도로 옆, 또는 밭과 길의 경계)에 각종 화초를 심고 보살피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낮 술 몇 잔에 흥얼거리며 곧잘 풍류도 즐긴다.
  그에게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선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는 낡은 논어나 맹자, 육법전서가 그의 지적 토대를 말해준다. 그들의 생활방식의 하나인 가정경제를 돌보지 않는 불치가산(不治家産)도 꿋꿋이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관을 상대로 심심치 않게 올리는 ‘상소’도 그가 구시대의 중심세력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가장으로서의 소임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아내의 강도 높은 잔소리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어떤 모멸의 순간에도 결코 담장 밖으로 큰 소리를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선비의 품위를 지킨다. 한번은 아내에게 푸진 잔소리를 듣고 공자 마누라도 악처였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내에게 핍박받는다는 점에서도 시대를 뛰어넘어 성현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 했다.
  가을걷이로 나남 없이 바쁜 날, 오후 내내 투덕투덕 뭔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자기키보다 한 뼘은 큰 도리깨로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콩을 터는 중이었다.  그는 ‘국가백년지대계(國家百年之大計)’를 논하러 동창회에 갔는지 또 안 보였다.
내가 시킨 일도 아닌데 땀 흘리는 그녀에게 괜스레 미안해 쩔쩔 맸다.
  “아휴, 힘든데 좀 쉬었다 하세요.”
  그녀는 촌에서는 쉬는 게 바보짓이라며 도리깨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쉭쉭’ 하늘을 가르는 도리깨는 그녀의 말뚝을 겨냥한 것 같았다. 아니, 항상 빈둥거리는 나를 향한 건가? 돌아서는데 뒷덜미가 서늘했다.
  
   요즘 동네가 조용하다. 남편을 닦달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다. 그가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서울 딸집에 머물며 침을 맞으러 다닌단다. 항상 의기양양해 다니던 그녀의 잰 걸음걸이에 힘이 빠진 것 같다. 그리 못마땅한 남편이 눈에 안 보이니 시원해할 만도 한데 파리를 씹은 얼굴이다.  
   항상 골목 어귀를 지키던 그녀의 말뚝이 없는데 나는 또 왜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지. 들고 날 때마다 운동모자의 챙을 들었다 놓으며 인사를 놓치지 않는, 그 깍듯한 예절과 지극한 자상함도 꽤 성가셨는데……. 막상 안보이니 매사에 분별력 있고 하늘 아래 모르는 게 없는 척해도 돈이 곧 인격인 세상, 힘 센 사람들이 경영하는 세상에서 고개 똑 바로 들고 살아가기가 꽤나 고달팠을 그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입으로 사는 의고적(擬古的) 인간인 그나 한 공기 밥보다 못한 글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나나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는가.
  가재미눈으로 그를 흘깃거렸던 날이 언제였던가. 나는 그녀의 말뚝이, 내 동지가 어서 건강을 회복해 파라솔 밑에 다시 앉기를 기다린다.    




  수행자                                                    

우리 집안은 숙면(熟眠)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자상하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잠을 잘 잘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뿐 아니라 때를 가리지 않고 자도, 많이 자도 비난하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오래전부터 정착된 잠에 관한한 너그러운 가풍은 다양한 방식으로 식구들을 배려했다. 우선 등교시간 외에는 잠을 자는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밥 때가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면 한 끼를 포기시키더라도 계속 자도록 조치했다.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든지, 놀다가 쓰러져 자든지 아무튼 집안 식구 중에서 누군가 자고 있으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일찍이 할머니는 룸펜 삼촌이 낮잠을 자는 머리맡에서
  “ 야는 잠 하나는 잘 잔다 아이가 ”라며 대견해 하셨다. 한창 일할 나이의 청년이 대낮에 코를 고는데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음으로써 가계의 전통을 성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증명하셨다. 어머니도 시어머니의 가르침에 충실해 잠자는 것에 대해서만은 말을 아꼈다. 내일이 시험인데도 쿨쿨 자고 있으면  깨우는 걸 자제했다. 책상에 엎드리면서 몇 시에 꼭 깨워달라고 당부를 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시간이 되어 두어 번 흔들어 보다가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의자에서 끌어내려 이불속에 넣어 버렸다. 성적이 엉망이 되는데 기여한 어머니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부끄러운 걸 알 나이였던 것 같다. 안방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 얼굴이 간지러워 눈을 떴는데, 방안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친척 아저씨였다. 아마 아저씨의 우려 섞인 눈빛 때문에 잠이 깬 것 같았다. 어머니는 과일이라도 깎으러 부엌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민망한 얼굴로 일어나려는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단박 아픈 사람이 되어야 했다.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이젠 좀 괜찮다고 했다.  연출된, 기운 없는 걸음걸이로 안방을 물러 나오면서 기가 막혔다. 손님이 왔으면 깨워서 딴 방으로 보내야지 입을 벌리고 자는 나를 그냥 안방에 방치해 놓다니.
어머니는 그런 식이었다. 정리정돈을 똑바로 해라. 깨끗이 씻어라. 밥을 남기지 마라. 공부 좀 해라. 신발 제자리에 벗어 놓아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행동을 규제하면서도 자고 있으면 조용했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오는 기색이 있으면 잠든 시늉을 한 적도 많다. 그러면 무슨 용무가 있어 기세 좋게 열고 들어왔던 문을 가만히 닫아주고 발소리를 죽였다.  
달라이 라마가 ‘잠은 최고의 수양修養’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럼, 할머니나 어머니는 자손들의 정신 수양을 위해 잠에 관한한 그리 너그러웠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년에 한 번, 초파일에나 절에 가는 고부가 달라이 라마의 수행에 관한 아포리즘까지 꾀고 있을 리가 없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할머니와 어머니는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굳게 믿었음 직하다. 많은 자식을 욕심껏 챙겨주지 못하니 보약 대신 잠이라도  실컷 재우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잠 하나는 실컷 자면서 자랐고, 지금도 남보다 많이 자고 있다. 살아오면서 계속 숙면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나는 생겨먹길 잠이 많게 생겼다. 쓸데없이 눈이 크고 눈 꼬리가 쳐진데다가 속눈썹이 빗자루처럼 매달려 있어 조금만 피곤하면 스르르 눈에 힘이 풀린다. 그래서인지 내 눈을 보면 멀쩡하다가도 졸린다는 사람이 있다.        
잠이 많은 사람은 대게 게으르다. 게으른 사람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기보다 안주하기를 즐긴다. 나는 잠(게으름의 다른 이름)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친 적도 많다. 그렇지만 능력도 없으면서 무리하게 일을 도모해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보니 얼굴이 뜨뜻한 게 아무래도 자랑할 일은 아니지 싶다.
잠이 많아서 게으른지, 게을러서 잠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신 수양’은 매일 매일 모자라지 않게 잘 하고 있다. 이렇게 성실히 修行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득도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순조로웠던 수행에 장애가 생겼다. 별다른 갱년기 증세가 없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하필 불면증이라는 복병이 내습할 줄이야. 잠을 못이루고 전전반측하는 밤이 무룻 기하이며 신새벽에 홀로 깨어 마당을 내다보다 아침을 맞는 일이 예사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벽에 걸려있는 보왕삼매론이 나를 그윽히 내려다 보고 있다.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 지지 못한다.
   성인이 말씀하시길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역시 득도는 만만한 길이 아니다.  






     내가 선호하는 뒤처리 방식

나온 순서도, 업적과 죄질에도 상관없이 황망히 하늘로 불려 올라가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게다가 이미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을 반 넘어 소비하지 않았는가. 요즘 들어 부쩍 죽음의 뒤처리 방식을 두고 생각이 많아진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때, 내가 묻힐 서너 평의 땅을 탐낸 적이 있다. 햇살 가득한 숲길에서 은초롱꽃 화관을 쓰고 어린 고사리를 품은 봉분과 만났다. 세월이 쌓이고 쌓여 푹신해진 꽃 무덤의 발치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찬기가 가신 따끈한 햇볕을 쓰고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편안하고 졸음이 왔다. 나중에 이런 자리에 눕고 싶다. 두툼한 땟장을 덮고, 산새 소리를 들으며, 철따라 정수리에 꽃을 피우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긴 길을 시름없이 내려다보았으면…. 철없던 시절이었다.
  내게는 이제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가족 납골묘가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볼 때마다 그 형식이 영 탐탁치 않다. 우선 견고하고 무거운 돌로 둘러친 공간이 많이 갑갑해 보여서다. 영혼의 드나듬도 원천봉쇄할 것 같은 거기에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지레 숨길이 가빠진다. 그뿐인가. 삼대를 넉넉하게 수용할 그 돌상자 속에서 또 다시 이승에서 맺은 인연들과 부대껴야 할 것 같아 절로 손사래가 쳐진다. 그보다 돌무덤을 꺼리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흙무덤처럼 풍화되어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집중포화를 맞지 않는 한 몇 백 년, 아니 천 년쯤은 족히 버틸 것 같은 대리석 무덤 속의 돌 항아리에 길이길이 남길 만큼 내 ‘가루’가 대단치 않아서이다.
  평소에 입맛이 당기는 건 풍장(風葬)이나 조장(鳥葬)처럼 자연의 호흡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 거칠 것 없는 너른 벌판이나 산정에서, 바람에 말라가는 나를 떠올려보면 생의 체증이 가라앉은 듯 가슴이 시원해진다. 여기에 황동규의 <풍장>의 권위를 빌려보자. “바람 이불 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 작정을 하면 죽음이 더할 수 없이 근사하게 다가온다. 이 방식이 끌리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덮어놓고 고집할 수가 없다. 내 시신을 처리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을 많이 번거롭게 할 것 같아서다. 우선 시체를 버려도 누가 되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비용도 그렇고 시간도 많이 할애해야 하니 경제적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는 방식이다.
  경제를 따지자면 시베리아 유목민처럼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가까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가는 합리적인 방식이 있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시신의 살점을 기꺼이 받아먹을 만큼 굶주리거나 비위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점이다.
  존경하는 어떤 유명 인사는 그냥 거적에 둘둘 말아 해부용으로 병원에 넘기라고 했다. 이 방식은 의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만하다. 하필 이때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질 게 뭐람. 젊은 의학도들이 빙 둘러서서 벌거벗겨진 나를 이리저리 헤쳐본다고 생각하니 어째 좀 부끄럽고 민망하다. 아직 어쭙잖은 여성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수장에 무게를 둔 적도 있다. 그냥 물에 ‘휙’ 던져 수질을 오염시키라는 의미로 오해하지 마시길. 부언하자면 수목장(樹木葬), 산림장(山林葬)이라고 풀 수 있다. 따지고 보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세상에 별로 이롭지 못했으니 가면서 나무의 거름이라도 되는 게 그래도 생산적인 일이지 싶었다. 남쪽 지방에 사는 어떤 이는 자기를 묻고 은행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오래 살고 수형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데다 낙엽 질 때 찬란하고 열매까지 열려서란다. 그는 꽤 알아주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이니 좋은 수종(樹種)을 선택할 자격이 있다. 내 처지로는 취향을 입에 올리기도 면구스럽다. 길가의 복숭아나무 밑이건 깊은 산속의 참나무 밑이건 상관없다. 아주 푹 잘 썩어 실한 과실을 맺게 해 지나가는 길손에게 보시할 수 있거나, 다람쥐 배를 채워줄 수 있다면 아마 내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지 싶은데…. 그도 여의치 않다. 아무 나무 밑에나 묻어버리는 건 명백하게 국법을 어기는 범죄행위가 아닌가.
  그래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밥풀장’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곱게 빻은 내 가루를 묻혀 숲 속에 뿌리는 거다. 출출한 새가 포르릉 내려 앉아 고물 묻은 밥풀을 물고 가는 걸 상상하니 흐믓하다.  

  장황한 사색의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해도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뒤처리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평생 부부가 불화하던 친척아저씨는 죽으면 절대 선산에 묻지 말라고 당부했다. 죽어서까지 또 아내와 나란히 자리하고 싶지 않다며 반드시 화장해서 산에 뿌리라고 자식들에게 오금을 박곤 했다. 만약 명을 어기면, 귀신이 되어 찾아와 해코지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곁들였다. 아저씨가 먼저 죽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않는 자식들은 아비를 선산에 ‘땅,땅’ 묻어버렸다. 남편 옆에 미리 마련한 자기 자리에 흡족해하며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나.
  아마 나도 도리와 편의에 따라, 인연이 지은 돌무덤에 길이길이 뼛가루를 남기기 십상이다.  이미 내가 없으니, 그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류창희   2008-10-15 07:54:36
송혜영님의 글을 올려달라는
애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우선 세편만 올렸습니다.
빙호   2008-10-16 12:13:35
그림을 보듯 선명하게 다가서는 영상이 있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작가의 문장력과 사유가 탐나 몇 번을 읽어도
감히 흉내낼 수 없기에 아둔한 감성만 탓해 봅니다.
좋은 수필, 잘 읽었습니다.
풍경   2008-10-16 15:21:38
찬찬히 읽자고 아침에 프린트 해서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읽고 또 읽었네요.
작가는 그냥 척 앉으면 글을 술술 풀어낸 것 같이,
마주 앉아 이야기 하듯 쓴 것 같으면서도
읽고나면 아하! 이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류창희   2008-10-16 18:41:00
빙호님 풍경님
그리고 글을 올리도록 허락해주신 송혜영님
모두 고맙습니다.

가을햇살이 좋은 날
야외 조각공원을 가로질러 박물관이 있는
문화벨트에서
가을 하늘을 보고
고추잠자리도 보고
허브향도 맡고 ...
그리고 말했지요.

"글이 좋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아있다고 ... "
호미   2008-10-16 19:45:17
글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동감이 가는 부분들에서 키들거리며 웃노라니
옆자리의 내 "말뚝"이가 제 컴터를 훔쳐 봅니다.
좋은 글을 읽는 행복감에 감사 드립니다.

류창희 쌤 덕분에
좋은 글 많이 읽게 되는군요.
모두에게 감사 드립니다.
송혜영   2008-10-16 20:47:22
빙호, 풍경, 호미님,
모자라는 글,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저는 재미없게 쓰면 누가 잡아간다고 을러대서 컴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답니다.
요즘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류쌤, 고선생님 응원 덕에 살아났습니다.
아! 다시 책상에 앉아야지.^ ^
호미   2008-10-20 20:32:09
송혜영 쌤!
(이렇게 호칭해도 되나요? 우리 쌤 칭구니까....)

덧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콩달콩 맛이 살아나는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인연이 되면 쌤의 싸인이 담긴 책도 읽구 싶어요.
- 류 창희 쌤의 싸인은 너무 멋지더군요.

사진으로 뵙는 쌤의 미소가 엄청 정겨워요.
좋은 글 기대하며....
류창희   2008-10-21 19:00:23
호미님
송혜영님에게 꼭 친필로 이왕이면 보는자리에서
멋진 싸인하시라 할게요^^*
사진도 찍어드리면서...
감솨
자하연   2008-10-25 21:40:27
송혜영님.
절여 놓은 배추처럼 척척 처지는 제 글에 한 참 지쳐가고 있는데
선생님의 글을 따라 가다 보니 생기 있는 물기가 쭉 올라오는 듯 합니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온 풀'을 보고 툭- 웃음이 터지네요
오래전 채마밭을 손좀 보라는 어머님 말씀에
풀인지 싹인지도 분간 못하는 새댁이
첩실 집 쳐들어간 조강지처처럼 온통 손에 잡히는 대로
머리채를 뽑아 난장을 부렸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올해 남은 시간동안
'그 여자의 말뜩' 같은 이야기 하나 풀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한 살 더 먹어 줄수 있을텐데...
우째 제 글방에는 빈 깡통소리만 더 요란합니다.
송혜영   2008-11-03 18:05:02
호미님께 사인 들어간 책 선물하기 위해서라고 열씸히 써야겠네요.^ ^
자하연님의 표현법이 저보다 한 수 위이십니다.
'첩실 집 쳐들어간 조강지처처럼'ㅎㅎ
뵙지는 않았지만 뵈온 듯 정겨운 분들 즐거운 나날 되세요.






任昶淳 : 작품으로는 불티산 36경(1985, 명문당), 한국의 숨결(2002, 청조사)이 있고,
2006년 교직에서 정년,
2년간 유랑하다가 겨우 귀거래사(歸去來辭) 한 한 폭 메고,
보령(保寧)의 노친한테 들어가 촐랑생이를 본뜨려 한다.


촐랑생이


임창순
  


꽃밭을 만들었다.
  올 초봄부터 창고를 헐어낸 자리에 만든 서너 평 될 꽃밭이다. 울안이 환하다며 모두들 잘했다고 하였다. 나도 50년 된 체증이 뚫린 것처럼 후련했다.
  꽃밭이 스스로 균형을 잡더니, 수선화 개나리 유의 노랑에서 송곳니처럼 솟아난 함박꽃순과 동백꽃 철쭉 유의 빨강을 지나, 이제는 온통 초록이다. 장미 몇 송이가 박혀 있지만, 초록강세에 묻혀 있으나마나다.
  그런데, 꽃밭 한가운데에 촐랑 솟아난 꽃나무가 있다.
  50센티나 자라버린 줄기 아래쪽으로 풀잎무리가 3단층을 이루고 있다. 가장 아래층에는 9개, 다음에는 7개, 상단에는 8개의 풀잎이 원반처럼 대를 둘러싸고 있다. 불쑥 나타난 궁노루처럼, 문뜩 떠 있는 무지개처럼, 장마에 슬쩍 솟아난 고사리처럼 우뚝 서 있다. 상단의 원반 풀잎 위로는 줄기 따라 잎사귀가 붙었는데, 맨 꼭대기에는 꽃몽올이 달려 있다. 알 수 없는 풀이다. 뽑아 버릴까 하였으나, 잡초 취급하기에는 너무 귀공자답다.
  무엇일까? 주변의 백합이며, 박하, 은방울, 창출, 분꽃을 제치고 올곧게 서있는 걸 보면 생명력이 보통 아니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자태도 늠름하다. 별 생각 없이 혼잣말로 묻는데, 곁에 계시던 노친이 촐랑생이라고 일러준다.
  촐랑생이라고?
  나는 곧 인터넷 사전을 찾아본다. 없다. 한글학회에서 낸 큰사전을 편다.「촐람성이」가  있는데, 설명은「두여머조자기」에 가 있다.
  『두여머 조자기 : 다년생 풀로 그늘진 곳에 저절로 나는데, 잎은 긴 잎대의 복엽으로  넓은 피침(披針)형, 두 세 잎이 전변(全邊)임. 봄에 옆의 잎에서 꽃꼭지가 나와 검은 자줏빛육수화서(肉穗花序)의 꽃이 핌. 열매는 붉고 아름다우나 독이 있어 모르고 따먹으면 입술과 혀가 부르틈.』
  사람을 지칭하는「촐랑이」라는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을 이른다지만, 식물 촐랑생이는 아주 곱고 듬직하다. 중통외직(中通外直) 하다 하여 주돈이(周敦頤)의 사랑을 받은 연꽃처럼 대가 곧고 아름답다.
  도시에서의 모든 일거리를 놓아버린 나는, 이제 촐랑이한테서 배울 차례인 것 같다. 이제는 유랑을 멈추고 촐랑생이처럼 살자.


류창희   2008-08-27 09:40:55
'촐랑생이'
저는 제목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글도 안쓰고
집안 살림도 제대로 안하고
촐랑대고 싸돌아 다니다가
CCTV에 찍힐줄 알았습니다.

글을 다 읽고
정말 선생님 글 속에 나오는
촐랑생이 한포기로 태어났음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귀거래사'의
오류선생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이 거기 계셔서
자연으로 돌아간듯 청량하답니다.

기차의 간이역처럼
잠시 내리셔서 차한잔 숨고름 하고 가세요^^*
류창희   2008-08-28 10:45:35
임창순 선생님!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전의 향기방>
1번 '귀거래사' 에서
선생님의 <퇴임사>를 통해
한 훌륭한 스승이 걸어 온 길을
보았습니다.


고경서(고경숙)

자주만나
식사하고
차마시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는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杜甫'가 떠오른다.
'詩聖'이기 때문이다.

고경서의 글은 '두보'처럼
한문장 한문장 허튼 수작이 없다.
한치의 빈틈없는 치밀함으로
완벽한 수필을 낳는다.

그러므로
작가 고경서는 多作을 하지않는다.

'氷壺'
'빙호'는 그녀의 호다.
성정은 온화해도
꼿꼿한 수필정신은
항아리 속의 얼음처럼 냉철하다.

고경서가 나의 벗이라서
나는 항상 든든하다.



귀소 / 고경서(고경숙)

기왓장 사이로 솟을대문이 보인다. 처마도 마른 속을 드러내며 삭아 내리는 중이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높은 담벼락 위로 시든 풀만 흐느적거린다. 지키고 감출 것이 그렇게 많았을까. 돌담을 겹쳐 두른 중문을 지나면 귀면와가 두 눈을 부라리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과 행랑채가 일가를 이루고 일찌감치 풍화에 들었다. 창살문 하나에도 꼼꼼하게 치장을 하고, 대청난간을 기어오르는 당초덩굴을 안으로 깊게 파 궁굴린 솜씨가 섬세하고 미려하다. 세월을 탁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지난날 융성하던 가문의 권세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리산 가는 길에 팻말을 보고 찾아 든 집이다. 주인 떠난 집을 말없이 지키던 담장을 돌아 유유히 고샅길을 빠져나가는 바람까지도 고색이 짙다. 놋대야 속살같이 어른대는 햇살 고인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니 소슬한 기운이 와락 달려든다. 살고 있는 터를 벗어나 오랜 집에 안기니 옛 사람이 된 듯하다.
겹겹이 쌓인 적요를 씻어 내리는 듯 댓잎 서걱대는 소리가 웃음소리, 한숨소리 되어 굳게 걸어 잠근 방문마다 문고리를 잡아끈다. 마당가에는 운동화 한 짝이 뒹굴고, 녹물을 뒤집어쓴 농기구들도 어지러이 널려 있다. 주인 떠난 뒤 누군가 지키다 뒤따라 간 모양이다.
빈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다. 푸름을 떨쳐낸 구근류(球根類)나 물고기가 놀 수 없는 강도 빈집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젠가는 생명을 품어 키울 수 있기에 폐가와는 다르다. 폐가는 사람의 체취가 가신, 붕괴 직전의 어둠만이 진을 치는 집이다. 시류에 휩싸여 유폐되었다가 느닷없이 몰락하여 다시 올 수 없는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집이다. 문짝이 부서지고 거미줄이 웅성거리는 집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하다.
빈집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비어 있는 이유가 있는 집이다. 숨길 것도 새삼스레 감출 것도 없다는 듯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집이다. 도시로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집을 지키던 노인들마저 세상을 등졌거나 가솔을 이끌고 도회로 나갔지만 '언젠가는 돌아와야지` 하며 비워둔 경우들이다. 잠시 삶의 무늬가 흐려지고 호기심에서 비꼈을 뿐, 그 집에는 사람의 체온이 머물고 다시 만날 기다림이 있다. 집을 손질하던 이들을 떠나보내면서 안타까움으로 아예 말문을 닫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끈한 아랫목의 온기가 그리워 견고한 적막만이 설렁설렁 담장을 넘는 그런 집이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간다. 당차게 뻗은 용마루 너머로 빈 밭이 보인다. 너저분한 밭머리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작물들의 질서를 지켜본다. 마당이 텃밭으로 변했을 숱한 시간을 점치며 내 삶의 자국도 헤아린다. 거두어진 자연은 뒷모습조차 편안하다. 이제는 설렁줄을 흔들며 호통을 칠 주인은 없다. 모서리가 닳은 섬돌 아래서 머리를 연신 조아리는 행랑아범의 몸짓만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집안 구석구석 사람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그것은 정지된 시간 속으로 함몰하는 쇠잔한 기운일 따름이다. 수많은 통과의례를 거친 집은 오랜 체념의 시간들이 서럽고 공허하다.
창호지가 찢겨져 나간 구멍으로 안방을 기웃거린다. 괘종시계조차도 숨소리를 죽이며 옛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방안에는 어둠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불끈 어둠을 움켜쥐자 봉인된 어둠들이 흩어진다. 곳간에는 큰 무쇠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욕망의 흔적으로 다가서는 곳이다. 한때의 부귀와 재물을 엄중히 단속했을 공간이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쿵쾅거리는 소리에 놀란 어둠이 목덜미를 일으켜 세운다.
먼지를 그득 담은 덩치 큰 배불뚝이 독이며 쌀뒤주도 인기척에 움츠렸을 것이다. 손때 묻은 세간을 곳간에 집어넣고 아쉬운 듯 몇 번을 뒤돌아보는 사람들의 가는 길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지금은 굳게 닫혀 있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부지런한 손길로 바쁘게 여닫을 곳간이라고 자물통은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허물어진 장독대 옆에 앵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키가 작지만 밑둥치가 혹처럼 불거진 것이 나무의 세월을 말해 준다. 집의 역사를 나무가 대신한다. 장독대 옆에는 해마다 봉숭아꽃도 피웠을 것 같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기억하는 나무, 교감(交感)이란 그래서 따스한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때깔을 벗고 나목으로 섰을 앵두나무가 텅 빈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묵은 집과는 막역한 사이로 보인다. 열매 맺는 나무의 생애가 인생과 참으로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메마른 가지에 와 닿는 칼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나목이나 사람의 체온이 가신 집에 깃드는 한량없는 쓸쓸함. 나무는 동면에 들고, 집은 참선에 들어 새로이 꽃을 피울 것이리라. 봄을 기다리는 마당가 앵두나무처럼 먼지는 웃으며 들어설 주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먼지가 대신 집을 지키고 있다. 집안 곳곳에 수북이 쌓여 주인인 양 길손을 맞는다. 빨랫줄에 빨래가 널리지 않을 때부터 축적된 시간이다. 바람이 이따금 기척을 내지만 꿈쩍을 않다가도 사람이 들어서면 얼른 일어선다. 그래서인지 텅 비어 있지만 꽉 찬 느낌이다. 새들도 날아와 지저귀고, 꽃씨를 뿌리지 않아도 꽃은 핀다. 해와 달도 쉬었다 가고, 밤하늘의 별을 어루만지며 제 허전함을 채울 줄도 안다. 도마소리, 솥뚜껑 여닫는 소리, 설거지 소리 끊긴 이후로 빈 굴뚝의 연기마저 자취를 감췄다. 나뭇가지를 훑는 소슬바람까지도 그것은 고스란히 껴안는다.
먼지는 그 집을 스쳐간 사람들의 말이며 생각이며 흔적이다. 새털보다 가벼운 먼지의 입자 속에는 추억으로 일궈 낸 삶의 궤적이 지층을 이룬다. 안주인의 손길이라도 기다리는 듯 미동을 않다가도 살창으로 스며든 햇살에 반가운 듯 나서지만 여간해서 흔들리지 않는 먼지야말로 빈집을 지키는 주인이다. 먼지가 사라지는 날, 이 집의 적막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으리라.
온전하게 비울 때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빈집, 빈 독, 빈손, 빈말, 빈 마음 이런 언어들 속에는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로 존재하는 허허로움이 내포되어 있다. 일몰 무렵 소멸을 꿈꾸는 노을에 나를 내맡기고, 깊은 심연으로부터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면서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한다. 비움은 또 다른 채움 아닌가. 여백이 가득 찬 빈집에 서면 어지럽고 뒤숭숭하던 마음이 비로소 여유를 찾는다. 옛정을 그리는 기다림과 무소유를 지향하는 여백이 향기 되어 비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지나는 바람도 마당에 이르면 일부러 덜컹거리며 큰 소리로 제 있는 곳을 알리는가.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집의 마음을 먼지는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엷은 인기척으로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다. 뿌연 먼지로 창궐하는 빈집을 휩싸고 도는 정겨운 바람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작가약력 : 경남 통영 출생
현대자동차주최 '엑센트 신 문화 기행" 대상
신라문학상 대상 (수필)로 등단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한국문인협회회원

방호   2008-08-23 08:45:55
이런 우연한 찬사에 익숙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해야할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어 고맙다고 해야할지 몰라
이런저런 궁리 끝에 말더듬이 흉내나 낼 수 밖에요...
그러고도 부끄러움은 남는 것.
류창희   2008-08-25 13:00:10
물에 비치는
저녘 노을빛에 붓을 들면
다시 고쳐쓰는 일이 없었다던
초당의 '왕발' 같은 사람,

타고 난 글재주로
산수 좋은 곳에서
술한잔에 달만보고도 시를 읊는
'詩仙'의 이백같은 사람들도 있겠으나,


한 글자 글자
한 문장 문장
시대의 사회상도
'비분강개'의 정신으로
땀과 눈물과 고뇌로 살을 깎는
두보 같이 치열한 사람.

빙호님은 '두보'의 이미지와 꼭 닮은 사람입니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고
주절주절 수다 떠는
저같은 사람!
빙호   2008-08-26 08:11:58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본인의 실책이 아니라
화살의 마음이라는 것을
반환점에 떠 넘기고서야
제대로 된 평상심을 회복했다고나 할까요.
춘야님!
이곳엔 제가 감당할 굴헝은 분명 없겠죠?
류창희   2008-09-05 00:47:03
두보가 사회시를 썼듯이
두견새처럼
토해내는 진달래빛 새소리
기다리고 있어요

애독자^^




100회 동안 읽은 목록의 책을
한 권 한 권 표지와 책소개를 프린트하여 벽면에 붙였다.








2008년 7월 10일 (목)
부산독서아카데미 제 100차 기념 행사


1999년 7월에 부산과 경남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만 매달려 사는 것에
교양적 소양을 갖추자고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과학독서아카데미’의 부산지회로 출발하였으나
1999년 9월 회원들의 의사에 따라서
<<부산독서아카데미>>로 독립하였습니다.
현재 토론에 참석하는 회원은 20여명 정도이며
나이는 20대에서 60대까지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둘째주 목요일입니다.



부산 독서 아가데미 까페글 (옮겨온 글)

글쓴이: 세속도시 조회수 : 52 08.06.30 10:11 http://cafe.daum.net/bbra/IFxM/1491
금요일 저녁에 100회 준비관계로 정인화님과 함께 대연동에 위치한 이을규회장님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 남부경찰서 앞으로 마중을 나와주셨습니다.
이재선 총무님도 함께 하시기로 하였는데 고향에서 어르신들이 올라오셔서 참석 못하셨고요.
그 동안 나누었던 책을 한장씩 한장씩 디카로 찍어두었습니다.
몇 몇 책들이 빠졌지만, 빠진 책들은 웹검색을 통해 표지 확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촬영뒤에 민락동 자연산 횟집에서 회장님이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정작 회장님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셔서, 송구스럽게도 정인화님과 둘이서 오붓하게(?)
멋진 저녁시간을 보냈습니다. 회장님께 다시 한 번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디카로 찍은 것을 정리하다가 <화양연화> 선생님께서 올리신
자료와 게시판 목록 확인을 위해 엑셀로 표를 만들었습니다.

올리신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려서
화양연화 선생님의 노고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록표에 보면 약간 혼동되는 부분이 있는데
내용을 아시는 분께서 댓글을 달아주시면 정확하게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7월 100회 모임은 풍성하고 의미있는 모임이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항상 건강하십시오.^^

  



부산독서아카데미 독서토론 목록표

회차
연도
도서명
저 자
출판사
비고

1
1999년 9월
사회생물학 논쟁
프란츠부케티츠
사이언스북스
 

2
10월
복제양 돌리
지나콜라타
사이언스북스
 

3
11월
    빌게이츠 @ 생각의 속도
빌게이츠
사이언스북스
 

4
12월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허만하

 

5
2000년 1월
인터넷 비즈니스 골든사이트
이주호, 김상우
매일경제신문사
 

6
2월
손정의 인터넷 제국의 지배자
다키다 세이치로
황금가지
 

7
3월
은빛 물고기
고형렬
바다출판사
 

8
4월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현각
현암사
 

9
5월
노자와 21세기
김용옥
통나무
 

10
6월
최고 경영자 예수
로리베스존스
한언
 

11
7월
영화 보기와 영화읽기
조셉 보그스
제3문학사
 
8월
 
 
12
9월
영화감상법(책나눔인지 아닌지 모름)
 
  
13
10월
차이와 타자
서동국
문학과 지성사
 

14
11월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이문구
문학동네
 

15
12월
가끔 절망하면 황홀하다
서정윤
문학수첩
 

16
2001년 1월
성찰적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박형준
의암출판문화사
 

17
2월
노동의 종말  
제리미 리프킨
민음사
 

18
3월
사랑은 지독한 혼란 :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울리히 벡 외
새물결
 

19
4월
원칙중심의 리더십    
스티븐 코비
김영사
 

20
5월
마음의 여행  
이경숙
정신세계사
 

21
6월
부생(아버지 날 낳으시고)
강승귀, 정은경 편저
지수
 

22
7월
돌아가는 배
김성우
삶과 꿈
 

8월
 
 
23
9월
세계의 음악기행
김성우
한국문원
 

24
10월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마크 쿨란스티
미래M&B 
 

25
11월
이슬람 : 9.11 테러와 이슬람 세계 이해하기
이희수
청아출판사
 

26
12월
등불하나가 걸어오네
강은교
문학동네 
 

27
2002년 1월
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28
2월
이윤기가 건너는 강    
이윤기
작가정신
 

29
3월
부산에 살으리랏다    
최해군
지평
 

30
4월
알몸 박정희    
최상천
인물과 사상사
 

31
5월
알몸 대한민국 빈손 김대중
최상천
사람나라
 

32
6월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영미
황금가지
 

33
7월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
에드워드 베르
을유문화사
 

8월
 
 
34
9월
쾌락의 옹호  
이왕주
문학과지성사
 

35
10월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이진우편저
서광사
 

36
11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최준식
사계절
 

37
12월
개망초가 쥐꼬리 망초에게  
최영철
문학과경계
 

38
2003년 1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비
 

39
2월
주역의 과학과 도  
이성환, 김기현
정신세계사
 

40
3월
벼랑에 선 대한민국 우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조갑제
월간조선사
 

41
4월
원예치료  
손기철
중앙생활사
 

42
5월
미술이란 무엇인가  
이경성
일지사
 

43
6월
케네스 쿠퍼 박사의 황산화제 혁명    
케네스 쿠퍼
대한미디어
 

44
7월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안효숙
마고북스
7, 8월 두달에 걸쳐  

45
8월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안효숙
마고북스
 토론을 하였는지(?)

46
9월
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47
10월
러셀 자서전    
러셀
사회평론사
 

48
11월
그림자 호수  
최영철
창작과비평사
 

49
12월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윤용이
학고재
 

50
2004년 1월
남자의 탄생    
전인권
푸른숲
 

51
2월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병관
현대문학
 

52
3월
신들메를 고쳐 매며  
이문열
문이당
 

53
4월
열정과 결핍
아시아를 잇는 대중문화
이나리
이와부츠 고이치
웅진출판
또하나의문화
한달에 두권을 나누었는지(?) 

54
5월
그리스도교와 무교  
김승혜
바오로딸
 

 
6월
 모임이 없었는지(?)
 
 
 

55
7월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은 왜 몰락하는가  
김종인
집문당
 

8월
 
 
57
9월
8월중 읽은 책 나눔
 
 
58
10월
포구기행
곽재구
열림원
 

59
11월
침묵    
엔도슈사쿠
바오로딸
 

60
12월
연말모임(?)
 
 
61
2005년 1월
그 남자네 집  
박완서
현대문학
 

62
2월
신의 역사 1권
카렌 암스트롱
동연
 

63
3월
신의 역사 2권
카렌 암스트롱
동연
 

64
4월
보살예수 :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길희성
현암사
 

65
5월
느림과 비움  
장석주
뿌리와이파리
저자와의 대화

66
6월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  
조수철
서울대출판부
 

67
7월
고기 욕망의 근원과 변화  
난멜링거
해바라기
 
8월
 
 
68
9월
8월중 읽은 책 나눔
 
 
69
10월
똥 오줌의 역사  
마르탱 모네스티에
문학동네
 

70
11월
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노마드북스
 

71
12월
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두레
 

72
2006년 1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이왕주
효형출판
저자와의 대화

73
2월
위대한 패배자
V 슈나이더
을유문화사
 

74
3월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 최재천
휴머니스트
 

75
4월
불멸의 유혹 : 카사노바 자서전
카사노바
휴먼앤북스
 

76
5월
미학 오딧세이3  
진중권
휴머니스트
 

77
6월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효형출판
 

78
7월
박제가와 젊은 그들
박성순
고즈윈
 
 
8월
 
 

79
9월
8월중 읽은 책 나눔
 

80
10월
칼에 지다  
아사다 지로
북하우스
 

81
11월
노성두 이주헌의 명화읽기  
노성두, 이주헌
한길아트
 

82
12월
백석 읽기의 즐거움
최동호 외
서정시학
 

83
2007년 1월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84
2월
붉은 여왕
매트 리들리
김영사
 

85
3월
유쾌한 심리학  
박지영
파파에
 

86
4월
영혼의 부정  
스캇 펙
김영사
 

87
5월
티셔츠의 경제학  
피에트라 리볼리
다산북스
 

88
6월
남한산성  
김훈
학고재
 

89
7월
호루라기  
최영철
문학과지성사
저자와의 대화

8월
 
 
90
9월
8월중 읽은 책 나눔
 
 
91
10월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92
11월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서경석외 2명
노마드북스
 

93
12월
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스
뿌리와이파리
 

94
2008년 1월
근대문학의 종언  
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b
 

95
2월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푸른역사
 

96
3월
바리데기
황석영
창비
 

97
4월
천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왕은철
 

98
5월
강희제  
조너선 D.스펜스
이산
 

99
6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100
7월
바보이랑
조명숙
화남
저자와의 대화



박영란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2003년 수필부문 <나이테>로 당선
<<에세이문학>> 2001년 가을호 등단
<<한국여성문학상>> 1999년 동화부문 당선
<<행복이 가득한 집>> 리포터
<<전북중앙신분>>에 박영란 <북 카페> 집필



참 웃기네

uam1113@hanmail.net
우리 집 봄의 상징은 군자란이다. 꼭 이맘때면 약속을 잘 지키려는 군자답게 어김없이 꽃이 핀다. 그런데 쭉 뻗은 꽃대에 핀 꽃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이름 값을 못하는 것 같다.
두툼하고 길쭉한 잎사귀만 있을 때는 꽃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가도 꽃망울이 뚝뚝 불거져 깔때기 같은 오종종한 꽃이 피어나면 군자란은 오히려 품위가 없어 보인다. 기왕이면 꽃송이가 화려하고 색도 주홍보다는 더 선명한 꽃이었으면 싶다. 원래 군자(君子)란 아름다움에 있어서 지나치지 않으려 함인지 그래도 난 군자란을 볼 때마다 이름과 실물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갖고 있다.
어느 모임에서 '별칭 짓기'라는 것을 해 보았다. 자기 자신에게 붙이고 싶은 별명을 스스로 지어보는 것이었는데, 흔히 별명은 다른 사람의 특징이나 버릇을 딱 꼬집어 주는 그 재치에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별명 짓기는 어색하고 좀 쑥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마치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우아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미소짓는 사람이라는 언젠가 지어본 3행시이었다. 사실 이것은 남편이 내게 바라는 희망사항이다. 은연중 그 의미가 그 자리에서 뛰어나올 줄은 나도 몰랐는데, 듣는 쪽에서는 내가 우아하고, 아름답고, 미소를 잘 짓는 사람이라고 자기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나보다. 나의 말을 듣고 웃는 그들의 모습이 '참 웃기네' 하는 반응이었다. 내가 군자란을 보고 그 모양에 무슨 군자꽃 하고 느끼는 그런 심사였던 것 같다. 별칭도 이름 못지 않게 제 구실을 하는데, 나는 새삼 별칭 값도 못하는 나의 주제를 떠올리며 쓸데없이 군자란에 시비를 걸고 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창가에 앉아 군자란을 보고 있으니 꽃은 나를 외면하고 있다. 꽃의 방향은 일제히 창 밖의 세계, 해를 향하고 있다. 군자란은 새침하게 돌아앉은 여인의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네가 해마다 꽃 피고 열매 맺고 이렇게 보아란듯이 자라는 게 누구 덕인데 싶었다. 물주고 영양제 주고 잎사귀 반질반질 닦아주는 나의 정성도 모르고 마음을 다른 곳에 두다니! 나는 괜히 심술이 발동하여 묵직한 군자란 화분을 홱 돌려 꽃대가 거실로 향하게 돌려놓았다. '무슨 날벼락!' 군자란은 놀란 듯 꽃송이 하나를 뚝 떨군다.
혼자서 저녁을 먹는 아들을 보고 있었다. 이것저것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고 있으면 그저 좋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것을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했던가. 아들은 잠시 그렇게 나의 먹이가 되어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왜 보는데'하며 언짢은 듯 얼굴을 찡그린다. 엄마가 보는데 왜 보다니! 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슬그머니 꼬리를 낮추며 독백을 할 수밖에. '참 웃기네'라고. 자식은 꽃이라고 했는데....아들도 이제는 엄마 품을 벗어나려고 고개를 외로 꼬고 자신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몸짓을 하고 있다. 몸은 듬직하고 키는 장대같이 커버렸지만, 생각과 행동은 아직 나의 테두리에 있는 미완성이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가꾼 또 하나의 군자란이 식탁에 앉아있다.
시선을 저 멀리 하고 봄을 본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련한 정물화 같다. 초록을 풀어 헤쳐놓은 엽록소의 신비, 그것이 바로 봄의 화신이지 싶다. 엽록소는 봄의 정기, 나무의 정기, 꽃의 정기를 뿜어내는 신성한 생명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해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바로 그 색소 때문인지 모른다. 비록 내가 심드렁하게 보고 있지만, 군자란도 잎사귀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빛과의 투쟁을 하겠는가. 저 길다란 꽃대가 바로 해를 보겠다는 발돋움 아닐까? 나는 일어나서 군자란 화분을 제자리로 돌려놔 준다. 마음껏 해를 마주보라고.
오렌지 와이셔츠에 노란 넥타이, 짙은 초록색 바지에 베이지색 콤비를 입고 출근하는 남편을 본다.
'와! 멋있다. 자기 군자란 같네'
남편에게 감탄사를 보내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벙긋 웃더니 회신을 보낸다. 오늘 낮에 밖에서 만나자고. 역시 남편이다. 아직 이런 즉흥성으로 있다는 설렘! 그것은 나른한 봄날 보약 한 사발 먹는 것처럼 생기를 준다. 설레며 특별한 날에나 가는 식당에 두 사람은 화사한 차림을 하고 꽃처럼 앉았다. 창 밖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넘실대고 실내에는 잔잔한 교향곡이 흘렀다. 그야말로 분위기가 끝내주는 곳에 그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문득 남편이 군자란처럼 보였다. 젊은 날의 홍안은 사라지고 눈가의 주름과 강건해 보이는 얼굴이 왠지 안쓰럽다. 외유내강한 남자, 그는 우리 집 군자다.
그러면서 내심 밥 한 그릇에 너무 아부를 하나 싶기도 하고 본전 생각도 나고 해서 나는 먹는 일에 열중했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분위기를 느끼지 않는 여자.
스스로 ‘참 웃기네’ 하며 남편을 본다.



<<바람이 데려다주리>> 저자
에세이부산 동인인 박영란님

그녀를 보면
그녀가 내 거울이었음 싶다.

겉으로 보이는 우아함에
품위있는 말씨
속 깊은 정이 뭉실뭉실

멀리서 바라볼수는 있어도 가까히 하기엔 조심스럽다.
그녀를 보면
'香遠益淸'
주돈이의 <애련설>이 떠오른다.

그녀는 은은한 연꽃향과도 닮았다.


   


좋은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심
영란씨! 고맙습니다.        


류창희   2008-07-14 07:57:18
참 웃기네.
다시 읽어봐도 또 읽어봐도
해학적인 사유로 곳곳에서 군자란 피우네요.

편안하면서도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독자를 끌고 가는 힘
쭉~~~~
끌려가다 '참 웃기네' 로 끝나는 부분에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
"참 웃기네"
박영란   2008-07-21 20:50:59
창희씨!
'참 웃기네' 글 보고, 또 창희씨가 쓴 댓글 보고
누군가가 '웃기네!!!!' 하면 어쩌지?
그렇지만 늘 나만 보면 예뻐해주는 창희씨가 있어 좋다우.
류창희   2008-07-22 08:20:13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다우.

돋보기 끼는 '50' 지천명의 나이
언제 다시 우리에게 오겠수.

그냥 더러는
참 웃기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우리 본래 이쁘게 살고 있는데....
오드리   2008-07-23 22:08:28
두 분 다 이뽀요.^^*
류창희   2008-07-24 08:19:44
'이뽀'라고 말해주는 오드리님까지
셋 다 이뽀^^*

공주病?
공주癌?

이뽄것이 죄라면
죄 달게 받겠소^^*
류창희   2008-11-09 08:30:33
우아미
<에세이부산 제7집> 자축행사와 더불어
이른 송년회를 겸했다.
그녀가 돌연 발표했다.
"한나라에서만 너무 오래 사는 것 같아서..."
몇달이 걸릴지 몇년이 걸릴지 ...

처음엔 그녀의 삶이
'아~ 멋지다!'
부럽더니,
11월 8일 추적추적 비맞으며
광안리 바닷가를 길건너 사이두고 걸으면서,
자꾸 풍선에 바람이 새는 듯한...

우아미, 그녀가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벗이 저 멀리 있다면
나의 삶도 더 멀리 넓어질 수 있거늘.

벌써, 그리움이란 단어를 떠 올린다.
류창희   2008-11-11 22:27:20
그녀가 사주는 칼국수를 얻어먹으며
그녀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다.
휴양차 떠나는 이에게 짐이 될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애써 피하고 싶은 그 눈길
내편하나 잃은듯 허전하다.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보다.
류창희   2008-12-31 09:38:24
아!
이 초장, 깻잎 고추...그리고 반가운 얼굴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합니다.
잠시 인터넷 방에 들러 오랜만에 메일을 여는 순간
이 뜨거운 만찬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두 모두 안녕하시지요?
전 그냥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클랜드 작은 아파트에 있으면서 슈퍼가서 장보고
샌드위치 만들어서 공원에 앉아 먹기도 하고 근교에 훌쩍 다녀오기도 하고.
모든 불편한것들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근데~
뉴질랜드의 대자연이나 어딜가나 맑고 깨끗한 물, 하늘, 호수, 그리고 공원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창희씨가 보내 준 우리 에세이부산 사진을 보는 순간만큼 감동스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 곳의 양, 소 덕분인지 버터 빵 치이즈가 얼마나 맛있는지
아직 '빨간' 것에 대한 미련이 없었는데,
이 갑작스런 입맛과 그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류창희   2009-01-13 08:44:52
꼭 그러한
그녀를 쏙 빼닮은
그 우아하면서도 청신한
이국적인 축하카드를 보고 또 보고.

'상은 당신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생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과분한 찬사에
내가 목메어 내글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때
우마이 당신이 소리내어 읽어주던 그 마음에
또 한번 감사드리며.

내 책상 유리 속에 장욱진의 <사찰>이 격을 높혀주듯이
내 생활의 격을 높혀주는 그대
그대와 더불어 문화를 누린다오.

이렇게 차가운
컴퓨터 자판 두들기기 말고 답신을 쓰려고
암만 앞뒤 두리번 거려도
'New Zealand Park Yoang Ran'
지구속 그곳이 다 자기 영역인양
세부적인 주소가 없어 이렇게 전한다오

창호지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
봄 햇살마냥 따뜻하게 여겨지는 오전에
영란씨를 향하여~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일시 및 장소

일    시
2008년 6월 12일 목요일 19 :00-21:00

장    소
서면 동보서적 4층 소회의실

토 론 책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 : 개정판

토론방식
자유토론

저자 및 역자 소개

저 : 오주석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간송미술관 연구 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21세기의 미술사학자라 평가받은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연을 펼쳤으며, 2005년 2월 지병으로 생을 마쳤다.

그는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읽고 그 속의 작가와 대화를 하도록 가르쳐준다. 그림 속에서 무심히 지나칠 선 하나, 점 하나의 의미를 일깨우며 그림의 진정한 참맛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98년에 <단원 김홍도>로 시작된 그의 저술은 계속 이어지면서 옛 그림에 대한 일반인들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학계에서는 그에 대해 "엄정한 감식안과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 고증으로 회화사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써 왔다"고 평가한다. 1995년 김홍도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 특별전'을 기획해 주목받았으며, 저서로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단원 김홍도』『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등이 있다.

오주석은 “우리 옛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전국을 돌며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연을 해왔다. 그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는 옛말을 인용하며, "감상은 영혼의 떨림으로 느끼는 행위인 만큼 ...

  

  
목차/책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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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방한 선속의 선 김명국의 <달마상>
옛 그림의 색채

2 잔잔하게 번지는 삼매경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3 꿈길을 따라서 안견의 <몽유도원도>
옛 그림의 원근법

4 미완의 비장미 윤두서의 <자화상>

5 음악과 문학의 만남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옛 그림의 여백

6 군자의 큰 기쁨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7 추운 시절의 그림 김정희의 <세한도>
옛 그림 읽기

8 누가 누가 이기나 김시의 <동자견려도>

9 들썩거리는 서민의 신명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
옛 그림 보는 법

10 올곧은 선비의 자화상 이인상의 <설송도>

11 노시인의 초상화 정선의 <인왕제색도>
옛 그림에 깃들인 마음  



  • 책속으로  
  


만약 하늘이 꿈속에서나마 소원하는 옛 그림 한 점을 가질 수 있는 복을 준다고 하면 나는 주상관매도를 고르고 싶다. 이 작품의 넉넉한 여백 속에서 시성 두보의 시름 섞인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늙은 김홍도 그 분의 풍류로운 모습을 아련하게 느낄 수 있으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옛 음악의 가락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과 문학의 만남,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중에서 --- p.129


수묵화는 점잖아서 보는 이를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감상자가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그림 속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수묵화의 감상은 감각되는 형상에 수동적으로 지배되고 압도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이가 사전에 풍부한 시각 경험을 쌓고 또 다양한 인생의 체험을 겪은 후에, 그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은근하게 작품이 암시하는 격조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옛 그림의 색채’ 중에서
--- p.30


겸재 노인이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60년간 예술로 사귀었던 친구 이병연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정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비통함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내 몸의 반쪽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으리라. 변화의 철학 주역의 대가이자, 팔순의 생애 동안 온갖 기쁨과 슬픔을 맛본 노인으로서 이제는 충분히 만사에 달관하여, 다가온 차디찬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차라리 그 자신의 죽음이었다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걸었던 마음의 벗으로 우정의 단단함이 쇠라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오랜 친구 이병연, 내 자신이나 같으면서도 결국은 내가 아닐 수밖에 없는 늙은 벗의 임종이 다가온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정선은 북받쳐 오르는 마음속 초조함과 실낱같은 친구의 회생을 바라는 절절한 원망을 참지 못하고 그만 크게 소리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화가였으므로 붓을 들어 화폭 가득 <인왕제색도>를 떠오르게 함으로써 소리쳤다. 가장 겸재다운 방법이었다. - ‘노시인의 초상화 정선의 <인왕제색도>’ 중에서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