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인문학
송태인 / 미디어 숲
머리말 -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살다가 떠납니다. 태어남은 세상과의 만남이고,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의 주고받음이며, 떠난다는 것은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여기서 삶의 초점은 ‘보고’, ‘주는’데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아는 것이며 ‘준다’는 것은 에너지의 순환행위입니다. 잘 보고 잘 주면 에너지가 선순환합니다.
인문학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나’가 바로 서야 나와 관계 맺는 수많은 대상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줄 수 있습니다.
예쁜 것들은 다 이유가 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내가 살아왔던 길을 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내가 살아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가기를 희망하나요?
‘당신은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당신은 가치 있는 삶을 사고 있는가?’
우리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대로 기대를 하고 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네 사회구조가 자녀의 문제는 단순히 집안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과도 결부되어 있어요. 학교에서 자녀의 서열은 부모의 사회적 체면 서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행복을 운운하지만, 내면에는 부모의 자존심이 깔린 겁니다. 이른바 학부모는 많아도 부모는 적다는 이야기지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녀를 출세가도에 몰아넣은 것은 사랑을 가장한 부모의 욕심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삶은 ‘평생의 관계’입니다. 평생의 관계 속에서 자녀의 학교생활은 성장기 일부분의 과정일 뿐이에요. 더구나 학교성적은 성장기 생활 가운데 일부에 불과해요.
‹맹자› 고자 편 - 맹자는 ‘대안과 소인의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인은 ‘마음의 이치’를 깨달아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것을 ‘주인’으로 삼습니다. 반면에 소인은 외부의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판단을 맡겨 ‘손님’처럼 이끌려 갑니다.
자녀를 위해 최신정보를 얻으려 여기저기 설명회를 많이 다니는 것일까, 좋은 학원과 족집게 과외 교사 선택을 잘하는 능력일까, 공부전략 잘 세워 좋은 학교에 보내는 능력일까. 그것도 아니면 경제력이 실력이라며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일까. 이것저것 집적거리는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아요.
대인이 길을 가는데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가장 큰 예입니다. 부모는 잘났건 못났건 자녀의 눈에는 큰사람이에요.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자녀가 더 잘 알고 있어요. 대인이란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허점을 가리고 회피하는 사람은 소인이에요.
티끌이 세상을 움직인다
맹자 고자 편 - 사람들은 자기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구나. 사람들은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방심(放心)하고도 찾을 줄을 모르는구나. 학문하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다. ‘방심한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를 위하는 척하는 도구적인 공부일 뿐이에요. 진정으로 ‘나’를 위한 공부는 순간순간 ‘나’의 변화가 느껴지는 공부예요.
잘하려는 사람은 실패하고, 꽉 잡으려는 자는 놓친다. 그러므로 성인은 잘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실패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잃지 않는다. 사람은 일할 때 언제나 일이 다 될 즈음에 실패한다. 끝을 조심하기를 처음처럼 한다면, 실패하는 법이 없다.
공부의 첫 단추는 내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초가 튼튼해져요. 우선 당장은 자녀교육에서부터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항상 같지가 않아요. 사춘기가 되어 자녀가 엇나가기 시작하면 내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실의에 빠지게 돼요.
사람은 만남을 통해 주고받으며, 만나기 전에는 깨끗한 상태였는데 만나서 주고받다 보니 욕심의 이기가 생기고, 기대와 섭섭함이 생겨 원래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없어져 버려요. 변하기 전의 ‘처음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 그것이 ‘공부’입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자녀는 내 마음을 가르쳐주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마음을 다시 살펴보라는 신호예요. 마음은 유전됩니다.
밥상은 영혼이다
먹는 행위는 삶의 종합예술.
자녀는 부모 마음의 거울이다
부모의 눈에 자녀는 항상 어린 자녀입니다. 자녀가 결혼해 간 가정의 가장이 되어도 부모 눈에는 걱정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잘나면 잘난 대로 걱정이고, 못났으면 못난 대로 더 큰 걱정이에요.
부모는 왜 자녀에게 잔소리할까요.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 자신의 걱정을 덜어내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입니다. 걱정이 많을수록 잔소리가 많아집니다. 자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어야 해요. 한 인간으로 내어난 이상 내 품에서는 ‘하늘처럼 존중’해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집 자녀들과 비교하는 순간 존중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맙니다.
노자 도덕경 29장 – 자녀를 소유하려는 것은 천하를 차지하려는 것보다 더 큰 집착입니다. 억지로 하면 무너지고 집착하면 잃어버려요. 자녀를 유치원 시기부터 꽃을 피우게 하려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것은 조기교육이 아니라 억지교육입니다. 사람마다 ‘때’가 다르고 ‘힘’이 다릅니다. 요즘 자녀들은 자존감이 낮아지고 있다는 걱정의 소리가 높습니다. 자존감은 사람으로 대접받을 때 좋아지고 무시당할 때 낮아집니다. 가정은 ‘따로’와 ‘같이’를 동시에 충족하는 영원한 보금자리입니다.
감각을 살리면 텔레파시는 통한다
화는 관계가 막혀 있다는 ‘양심의 신호’, 즉 불통의 알림이에요. 소통이 잘 되면 양심은 화를 내보내지 않아요.
우리는 크고 작은 싸움을 하다가 마지막까지 해결이 안 되면 양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요. “당신은 양심도 없느냐!” “너는 양심에 손을 얹고 물어봐라.” 등 양심은 신성한 영역의 심판기준으로 사용해요. 그래서 전통적으로 양심은 법과 사회규범보다는 상위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양심은 사람을 살리려는 ‘신호체계’다.
왕자와 거지는 공통점이 더 많다.
비교는 건강한 목적을 충족시키려는 방법으로 그쳐야 합니다. 비교 그 자체를 목적에 두기 시작하면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목적을 잃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구에 묻히기 쉬워요.
노자 도덕경 47장 – 노자는 다른 점을 찾는 공부는 바쁘기만 할 뿐 얻는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은 쌓고 쌓아도 끝이 없으며, 결국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지물이 된다. 노자는 ‘근본 이치’를 공부하라고 권하고 있다.
마음에도 먼지가 쌓인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 할 수 있으면 이름이 아니다. - 노자 도덕경 1장. 여기서 무(無)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다른 이름이에요. 그래서 무의 세계는 섣불리 눈으로 드러나 보이는 말이나 글로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의 세계는 우주 만물의 시작이며, 움직임이며, 근본법칙입니다.
자녀들의 학교성적은 눈에 보이는 ‘결과’의 세계입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려고 노력하되, 미리 그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마라. ‘오늘은 심히 피곤하다. 싹이 자라도록 도와주었더니’ 알묘(揠苗)조장(助長) 봄이 되면 새싹은 때를 알고 돋아납니다. 지금 인류는 새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부모는 기존의 틀과 그 기준에 강요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그래도 정은 남는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인사하는 법, 식사예절, 걸음걸이 등 사소한 예절부터 가치관과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려 애를 쓰셨습니다. 지금도 자식들과 손자들을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인성교육이 이루어집니다. 지금도 인성교육을 잘 받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따뜻한 정을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공손추가 물었다. “군자들이 자녀를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날에는 자녀를 서로 바꾸어 가르쳤었다. 부모 자녀 간에는 책선(責善)하지 않는 법이다. 책선하면 정이 떨어지게 된다. 정이 떨어지면 불쌍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맹지 이루편. 부모의 올바른 말은 ‘머리’로는 맞다 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맹자는 부모와 자녀는 머리보다 ‘가슴’으로 관계를 맺으라고 권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만남, 주고받음, 헤어짐을 반복합니다. 사람이 만나서 주고받음이 없었다면 ‘일’도 없고 ‘기억’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고받다 보면 ‘욕심’이 생기게 되고 그 욕심이 커지게 되면 ‘집착’이라는 기억의 경계가 발생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작은 소리라도 잘 듣고 정서를 체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면 사랑의 눈빛으로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예를 갖추어 대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그로 인해 배신감을 느끼는 순간 자녀들의 정서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는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합니다.
바람은 흘러가기 때문에 다시 온다
한동안 담장 허물기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웃과 이웃 사이의 담장을 헐고 그 사이에 화단을 만듭니다. 하지만 정작 마음의 벽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어요.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벽은 단단합니다. 왜냐하면, 아쉬울 게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죠. 사람은 주고받을 것이 있다고 판단할 때 마음의 문을 열어요. 내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서예요. 외형으로 비친 나의 잘난 이미지가 손상될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마음의 벽을 쌓는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어요. 특수한 비즈니스클럽에서부터 일반적인 동창회, 향우회, 종친회까지 다양합니다. 그 속에서 유유상종의 심정을 털어놓지만, 그 속에서도 또 다른 끼리끼리의 파벌이 생겨요.
장자 제물로네 원래 자연은 하나입니다. 도도 하나입니다. 사람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말이 생기면서 나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옳다는 것과 그르다. 좋다는 것과 싫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말이라도 자기가 선택한 편을 유리하게 듣습니다. 우리는 말에 의해서 스스로 벽을 만들고 구속합니다.
위령공편에 공자왈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 것이다.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도 말한다면 말을 잃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 공자는 ‘관계 맺기’의 대가입니다. 그는 행복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마음의 벽을 없애는 데 있다고 단언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계속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합니다. 공자는 그 비법으로 시중(時中)을 제시합니다. ‘때에 알맞게 적절한 빈 곳을 찾아주라’는 이야기. 타이밍이다.
내 마음을 아는 자가 세상을 이끈다
어릴 때부터 필요 이상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은 자칫 아는 체하는 병을 키울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배움으로 이르는 길을 방해하거나, 진정한 깨달음의 귀함을 배울 기회를 빼앗을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만심이 생깁니다.
사람의 색깔을 변화시키는 ‘학습’ 이야기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용할 수 없는 공부는 내 것이 아닙니다.
맹자는 공자가 이야기하는 적극적인 공부를 ‘자득’이라 표현합니다. 자득의 공부는 외부의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근본 이치를 스스로 왜 그런가에 대한 질문으로 터득하는 것.
공자 왈 “싹이 나도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이 있고 꽃은 피워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유치원 때부터 꽃을 보아야 직성이 풀려요. 꽃은 피면 지는 법입니다. 빨리 피면 그만큼 빨리 집니다. 그래서 꽃은 중년에 피어야 합니다. 인생의 열매는 말년에 맺어야 단단합니다. 열매는 그동안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새로운 ‘사랑의 에너지’.
사랑과 짝사랑은 눈빛의 차이다.
집중력이란, 나와 대상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정도를 말합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다다르면 나와 대상의 사이가 없어져 하나처럼 느껴집니다. 남녀가 열애 중일 때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애정표현에 과감해집니다. 그들 사이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장자 대종사편 ‘좌망(坐忘)의 공부법’ 좌망이란, 앉아서 고스란히 나를 잊는다는 말. 좌망은 하나하나 잊어갈수록 더 많이 아는 공부입니다. ‘인의’을 잊고 ‘예악’을 잊고 나중에는 ‘나를 고스란히 잊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공부법.
생각의 방은 정리정돈을 하지 않으면 생각도 또 다른 생각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킵니다.
교과서는 그 사회가 합의한 공동체 가치의 결정체입니다.
공자 왈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기 수양을 위해서 공부했는데 오늘날의 배우는 자들은 남에게 발탁되기 위해서 공부하는구나. 한문 편
뿌리는 아래로 향하고 싹은 위로 향한다
대한민국은 교육의 초강국. 인구대비 선생님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입니다. 교육은 ‘서비스’로 인식되면서 더 빠른 속도로 양질의 교육 콘텐츠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서비스는 소비자의 만족도가 경쟁력이에요. 서비스업은 소비자의 불만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강사는 지식과 기술을 파는 서비스맨이에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강생이 왕입니다. 하지만 강사가 학생에게 아부하는 순간, 교육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는 게 너무 많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는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삽니다. 그 ‘믿음’이 깊어지면 ‘신념’이 생기고 신념이 강해지면 ‘고집’으로 굳어집니다.
부모는 교사를 조건 없이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돕는 길입니다.
노자 도덕경 76장- 사람은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뻣뻣하고 굳어진다. 풀과 나무는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죽으면 말라서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뻣뻣하고 굳는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로 처지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놓이는 것이다. 정신도 마찬가지. 사고가 딱딱한 사람은 쉽게 부러집니다. 사고가 유연한 사람은 생명력이 길어요. 나이가 들수록 딱딱해지는 사람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자연스러움의 가르침은 큰소리치지 않아도 자녀들이 순종합니다.
맹자 진심 편- 귀한 신분을 믿고 와서 묻거나, 현명함을 믿고 와서 묻거나, 연장자임을 믿고 와서 묻거나, 공로가 있는 것을 믿고 와서 묻거나, 연고를 믿고 와서 묻거나 할 때에는 모두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응하지 않는 것도 교육의 한 방법입니다.
본래 시험은 평가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공자 왈 남이 나를 몰라줄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 공자는 늘 ‘나’를 걱정하라고 당부합니다. 모든 문제는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안’이 부실하면 ‘밖’이 화려하고 단단해 보여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이스크림은 여름에만 먹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살려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많습니다. 돈, 외모, 연줄, 집, 차, 여유….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학벌’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옷으로 통해요. 아무리 외모가 출중해도 거기에 걸맞은 멋진 옷을 입어 주어야 폼이 납니다. ‘옷이 날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다, 같은 옷이라도 값비싼 옷이 더 좋아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옷(학벌)을 마련하는 데 시간, 돈, 에너지를 아끼지 않습니다. 옷의 가치를 아는 사람일수록 과감하게 투자하고 배팅합니다. 학벌은 그 사람의 배움 정도를 그 사회에서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무형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일종의 프리미엄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프리미엄은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할 때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교육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활동이다. 행복은 또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아리스토렐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
대학선택은 생계와 직결된 선택이니 초 중 고 의 목표는 더 나은 대학입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취업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다. 그 틈에서도 퇴직 후 연금 등 노후 걱정도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미래 가치에 치중하느라 현재 가치를 못 보거나 포기해야 하는 구조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장수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나비는 훨훨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유유자적하면서 재미있게 지내는데,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장주가 나비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없다. 이것을 물화(物化)라고 한다. - 장자 제물론-
즐겁지 않으면 진짜 공부가 아니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이끄는 위치에 서 있다 보면 서서히 자만심이 싹트기 시작해요. 자만심은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먹고 쑥쑥 자랍니다. 자만심이 커질수록 배움에는 장애가 됩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움의 문은 닫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공자 왈 “배움에서는 항상 아직 미치지 못한 듯이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히려 배운 것조차 잃어버릴까 두려워해야 한다.” 공자는 배움에서 ‘겸손’의 미덕을 강조합니다. 배움에는 겸손이 스승입니다. 배울 때는 아무리 겸손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설령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다시 가르치려고 해도 자세히 듣는 태도가 배우는 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들숨보다 날숨이 더 편안하다.
도덕경 48장 – 배움은 날마다 쌓는 것이고 도는 날마다 덜어지는 것이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게 된다. 유위(有爲), 무위(無爲). 유위는 지식을 쌓고, 학력을 쌓고, 보이기 위한 직업을 쌓고, 돈과 권력과 명예를 쌓습니다. 무위는 남을 의식하는 지식, 졸업장, 직업, 돈과 권력과 명예를 덜어내는 것. 유의의 삶이 어쩔 수 없이 가는 길이라면, 무위의 삶은 자연스럽게 가는 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유위는 남의 길을 가는 인생. 밖에서 보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포장. 주면 돌아옵니다. 빼앗으려 하면 도망갑니다.
도덕경 44장 명예와 생명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절실한가. 나의 몸과 재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얻음과 잃음 어느 쪽이 더 해로운가. 만족할 줄 알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이제는 가치가 경쟁력입니다. ‘나’를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무궁화호는 KTX를 먼저 보낸다
카드보다는 현금을 선호합니다. 외상이 싫어서입니다.
맹자 신심 편 – 공자 왈 나는 사이비(似而非)를 싫어한다. 강아지풀을 싫어하는 것은 벼 싹과 혼동될까 두려워서이다. 말재주 있는 자를 싫어하는 것은 의를 어지럽힐까. 정 나라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바른 음악을 어지럽힐까. 자줏빛을 싫어하는 것은 주황빛과 혼동될까. 항원을 싫어하는 것은 덕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이다. 짝퉁이 판을 치는 시대는 짝퉁이 주인이에요.
플라톤 《국가》 - 사람은 물욕에 한번 빠져들면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남의 것도 착각이 아니라 실제 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에요. 가난한 사람은 노예근성이 생기거나 성품이 삐뚤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도덕경 52장 – 우주 자연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무시무종(無始無終). 돌고 돌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혼돈 속에서 욕심을 키우게 됩니다. 욕심은 곧 근심입니다.
자녀는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내 것으로 생각하면, 욕심이 생깁니다. 자녀에 대한 걱정은 대부분 욕심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내 것으로 생각하면, 자녀는 평생 ‘손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녀가 성장하여 손님 행세를 하면 손님이 아니라 원수로 돌변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스스로 ‘주인’으로 살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과감하게 마음에서 놓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도덕경 16장. 노자는 ‘자기 본성’을 찾는 것. 말은 쉬워도. 자기 본성이란 ‘근본으로 되돌아가라’는 이야기.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는 ‘현재의 위치는 근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
도덕경 27장 – 참으로 잘 달리는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참으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 없다. 참으로 셈을 잘하는 사람에겐 계산기가 필요 없다. 참으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지 못한다.
육신의 안위를 위해 영혼을 팔지 않는다
육신의 안위를 위해 영혼을 팔지 않는다. 좌우명입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돈이 조금 더 많았더라면… 심보가 항상 달려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 철학의 핵심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상당수의 아이는 돈을 버는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합니다. 그때마다 요즘 아이들은 돈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 왈 “부와 귀는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 바이지만 정당하게 획득된 것이 아니면 누리지 않는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극 정성’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인’입니다. 밥을 먹건 구차한 때를 당하건 위급한 순간이건 일관되게 사람을 정성으로 대해야 군자입니다.
돈은 있으면 쓸 궁리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돈을 벌 수 있는 만큼 버는 게 아니라, 쓸 만큼 벌면서 삽니다. 돈의 주인 된 마음입니다.
꿈은 주려는 마음에서 싹튼다
누구나 인생의 스승은 있습니다. 무문(無門) 선생, 그분은 내 것 아닌 것을 되돌려주고 가는 것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분의 철학 핵심은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물은 주는 시스템입니다. 주면 받게 됩니다.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주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넉넉합니다. 받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불안합니다.
장자는 개념을 깨는 도사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장자는 ‘주는 척하는 것’과 실제로 주는 것은 다르다고 합니다. 명예에 얽매어 주는 것은 주는 척하는 것입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략의 곳간이 되기 쉬워요. 장자는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억지로 주는 것은 이미 가식이라고 합니다.
청소년기는 줄 것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가면 줄 것이 보입니다. 주는 행위가 행복한 이유는 더욱 적극적인 인생을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경 8장 가장 훌륭한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물기 때문에 도에 가깝다.
노자는 줄 곳을 낮추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려면 ‘물처럼 살라’고 권합니다.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에 경쟁자가 없어요. 경쟁자가 없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줄 수 있기에 마음은 깊고, 어진 사람과 사귀며, 진실한 말을 하고, 정의롭고, 일은 효과적으로 하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싸울 일이 없습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주면 더 강한 에너지가 생깁니다.
비우면 다시 찹니다. 주는 것은 적극적인 삶의 태도예요. 비우지 않고 쥐고 있는 것도 게으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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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수대다.
아들들아, 며느리들아.
너희가 힘들어서 짜증을 내면, 내가 깨끗이 씻어 엎어놓으마.
언제든 나를 사용할 때는
잠시, 햇볕을 한번 쐬고 사용을 하렴.
그래야, 엄마의 노고가 하얗게 소독된다.
-스토리는 우리의 작은 삶을 확장해주는 훌륭한 장비.
- 똑똑한 리더는 이야기로 설득하고 멍청한 리더는 그저 명령만 내린다
- 이야기가 당락을 결정한다. 면접에서는 일단 말을 잘해야 한다. 약장수처럼 막힘없이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조리 있게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격조건은 면접의 기회를 만들어줄 뿐 스토리텔링이 좌우한다. 자기소개서에 나열했던 많은 내용을 어떻게 바로잘 엮어내는가가 면접관의 관건이 된다.
-스토리를 통해 우리는 바다로, 달로, 대통령궁으로, 농부의 집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스토리는 우리가 세상에 눈뜨고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해 주지요. -로버트 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