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의 시간이
꼭 4년전 일처럼 선명했다.

가산초등학교 정교분실 4학년때
담임 박상룡 선생님과
이춘복 조옥례를 번개팅으로 소집

가는 날이 장날이라 내부수리 중
빨리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에
옆에 허름한 감자탕집으로 옮김

뭘 먹었는지 정신이 없었고
얼굴만 보고 또 보고






조촌에 살던 옥례는
송우리에 살고 있으며
딸이 시집가서 아들 딸을 낳았다고 한다.

옥례는 얼굴도 예쁘지만
글씨도 잘쓰고
바다와 소나무와 아침해를 잘그렸다.

초등학교때 옥례를 생각하면
항상 찔레꽃처럼 하얗고
찔레향이 번진다.
천경자 그림 속 '길례언니'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 얼굴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니
와아~ 정말 실감난다.



춘복이와는 길하나 건너사이에 살아
집안 속속 너무나 잘안다.
늘 손잡고 과수원길 지나
개울건너 학교를 걸어다니곤 했었다.

춘복이네 집 마당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잘놀았다.
오랫말이나 고무줄 놀이를 하면
나는 펄쩍펄쩍 같이 뛰지 못하고
줄 붙잡고 서있는 것도 자랑스러워
얼굴이 벌개지곤 하였었다.

춘복이 말이 내가 어렸을 때
마음이 너무 여려
누가 조금만 크게 말해도
야단치는 줄 알고 울었었다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운다.
너무 웃다가 울고
예쁘고 좋아서 운다.
태어날 때부터 눈물샘 조절판이
불량품이었나보다.

우리 '호랑이 박상룡선생님'
그때 불같이 무서웠었는데,
지금 보니 하나도 안 무섰다.
오히려 우리가 막 나무랐다.
사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

초임발령을 받아 3년동안 초등에 계시다가
바로 서울 광운중학교로 가셨다.
아마도 우리를 만나기 위한 교육부 배려였나보다.

나는 줄곧 서울에서
장위동 선생님 댁을 드나들다
결혼하면서부터 찾아뵙지 못했었다.

사모님께서는 당신의 시동생에게 시집오라고 하셨었는데
하마터면~~
선생님 제수씨가 될뻔 했었다.

솔찍하게
우리 신랑 인물이 훠얼~씬 미남(?)
천만다행이다^^*





옥례왈 : 항상 아쉬움이란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걸 선물하는구나
다음엔 진하게 소주 한잔 하자구

당연하지 편하게 옷입고
퍼대앉아
찔레순 오디 삘기 안주로 긴밤지새우고...

춘복왈 : 선생님 초대해 즐거웠고
활기찬 네모습 좋았구
두루두루 고마웠어
다음에 또 보자

제사인데도 금새 달려와 만나주어
11살 소녀시절로 돌아가 재잘재잘
너무 신났었다.



검은 고무줄 팬티 흰런닝입고
본교인 가산초등까지 운동회하러 가고

개울에 나가 단체로 멱감기고
팬티만 입고 키재고 가슴둘레 쟀었다.
그때 공부 잘하고 글씨 잘 쓰는 옥례는
기록을 했었다.

선생님 말씀 : "그때 너회들 가슴둘레는 내가 다 쟀는디..."
"맞다! 그때 누구 가슴이 가장 컸을까?"
"ㅋㅋㅋㅋ"
"하하하"
선생님과 같이 늙어간다.



나의 스승 박상룡 선생님

서울과 불과 40분 거리지만 강북이라고 전혀 개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정교리 정교분실국민하교.
류(柳)씨 이(李)씨 조(曺)씨의 집성촌으로 신문화와는 거리가 먼 외딴 오지. 매스컴이라고는 선거 때마다 붙는 벽보와 이장 집에서 틀어주는 라디오가 전부인 마을에 “류창희 워디 갔다 온겨” 충청도의 진한 사투리와 함께 새 바람이 불었다.
두개뿐인 교실에 흐린 날은 두 학년이 합반 수업을 받고, 맑은 날은 리어카와 삼태기로 운동장 돌 줍기, 겨울 날 솔방울 주워 난로 때기, 여름에 개울에 나가 멱 감기… 들, 산, 개울이 모두 열린 교실이었다.
공부보다는 일손이 귀해서 아이 보는 것이 우선인 우리들에게 본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 며 서울 나들이를 강행하셨던 박상룡선생님.
리라국민학교 수업참관, 창경궁을 둘러 찾아간 5층 건물의 신문사에서 귀청이 떨어지도록 윙하는 소리와 함께 신문이 나오던 신기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일손을 놓고 자식 덕분에 서울나들이 한다고 무지개떡, 계란, 밤, 등을 삶아 머리에 이고, 고운 한복차림으로 따라오신 어머니들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으시며 흐뭇해하시던 선생님.
분교 뒷 모퉁이 숙직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일깨워 주셨다.
그 후, 우리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왔고, 지금은 부산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둔 주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교과서 지식보다 함께 뛰고, 땀 흘리고, 생각하고, 참여하는 생활자체를 소중히 여기시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떠오르곤 한다.
성적과 입시로 이어지는 요즈음의 교육현실에서, 당시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은 서울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빈다.


1994년 5월27일자 부산일보 실렸던 글

2008년 6월 21일


손영란   2008-06-30 08:03:55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만남과 글, 아름다워요.
류창희   2008-06-30 10:11:17
학교
여덟살에 들어가
십대에도 다니고
이십대에도 다니고
사십대에도 다니고
오십대에도 다니고

이 학교
저 학교
시간나면 다니고
등록금 마련하면 다니고

그래도 이력에다
내놓으라 하고 당당하게 적을 이름도 별루 없건만...

근데요.
졸업도 못한 <정교분실>은
정말 자랑스럽답니다.

스스로 신문지상에다가도 내놓죠.

그곳의 선생님과 친구들
늘 행복한 '유년시절 진행중' 입니다^^*



모임이 있을 때,
"부산에서 왔는데요" 말하면
사람들의 첫번째 질문은
"무엇을 타고 왔나" 를 묻는다.

KTX를 타면 한나절이면 도착해
하루일정을 보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아주 먼곳에서 온것 처럼 반겨준다.
부산 덕을 혼자 다 본다.





원로 선생님들은
'부산' 이라고 말하면
우선 눈을 지그시 감으며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아마도 피난민 시절을 회상하시는가 보다.
그러면서 꼭 부산의 안부를 묻는다.

40계단이 있었는데....
부두, 국제 시장, 미문화원, 광복동, 자갈치 시장 등등

40계단 근처를
테마거리로 만들어 놓았다.

물지개를 진 소녀의 동상
무엇이든 이겨낼 의지가 온몸에 충만하다.
눈빛이 살아있다.

그 시절 소년소녀들.
지금
우리 전후 세대가 존경하는
원로선생님들 세대가 되어
곳곳에서 '불굴의 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그때 우리 언니 오빠들을 업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40계단을 오르던 어머니들.
그분들은 대부분 선진조국을 못보고 돌아가셨다.






20계단쯤 오르면 숨이 차다.
잠시 걸터 앉아
단추 하나만 누르면
아코디언을 들고 있는 거리의 악사가
'경상도 아가씨'를 연주한다.






내가 처음 부산으로 왔을 때만 해도
'성바오르도 출판사'가 있었는데
건물도 새로 짓고
맨 윗층에는 잠시 용두산 공원을 내다볼 수 있는 쉼터도 있다.







불타던 미문화원이
근대역사관으로 이름바꿔 부산을 지키고 있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용두산 공원을 자주 찾았다.

한쪽은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고
한쪽은 돌에 새긴 시비가 줄지어 있다.

나무 그늘이 무성하여 산책하기 좋다.





부산에 하나밖에 없던
잘나가는 미화당백화점 이었다.

저 붉은 건물 한번 들어가려면
우선, 잘차려입고
지갑이 두둑해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벗어야 들어가는 찜질방이 되었다.
그뿐인가.
지은 죄 없이도 불가마에 들어가
땀 뻘뻘 흘리는 찜질을 당해야 한다.
그래야 죄가 사해져
온몸이 시원하다.

옛 영화롭던 시절 상상하기 힘들다.





용두산 공원
비들기가 모여있고
아이들이 꿈동산처럼 여겼는데,
곳곳에 바둑두는 노인들과
일본만 중국말 동남아 축소판 같다.

관광지 역할만 한다.





광복로
우선 불빛이 환하다.
아이스케키를 한 바구니씩 팔던
'석빙고'집이 없어졌다.
'원산면옥'은 아직 골목에 그대로 있다.
국제시장쪽으로 거슬러 가는길
유명하다는 족발 집도 많다.

서울 명동처럼 가장 번화한 거리였는데
서면으로
광안리로
해운대로
부산의 명소를
차츰 빼앗기고....

그래서 다시 새롭게 단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 한산하다.
식사하고 나왔을 때는 지나는 사람들 서로 어깨가 부딪혔다.





유나 백화점 앞
일년에 한 두번
주로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이 앞에서 배회하면
상당한 문화를 누린듯 했었는데
백화점 흔적도 없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젊기에
내 짝지와 난 까불고 놀았다.

쭈글스럽다고?
아무도 우리 따윈 안 쳐다본다.
광복동 풍경화속에 스쳐지나갈 뿐.





'부산'하면 떠오르는 '자갈치 아지매'
그 아지매들의 삶의 터전
자갈치 시장이다.
퍼대앉아
구수한 사투리로
횟거리 호객행위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맞이한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그곳의 사람들과 어우러져 자라야
그곳 사람이다.

부산생활 26년차
더구나 아이낳고 살림하면서
자주 외출했을 리 없다.

느닷없이
남편이 시내한번 나가볼까 하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남포동은 한 10년 만이다.

부산 사람들 떠난 자리에
객이 와서 정착해
부산 시민을 둘이나 낳았으니
내가 바로 '부산지킴이'다.






자갈치 시장 뒤에 부산영도 다리가 보인다.
눈 앞에 불빛이 가득한데
그곳이 '영도'라고 한다.
바닷물 출렁거리는 방파제 앞에
조명등들이 예쁘다.


반 나절 동안
운동화 신고 부산을 싸돌아 다니다.

6월 7일



에세이스트 답글


김병기- 와따 마 창희 쌤 덕분에 오랜만에 시내 구경 잘 했심더....지는 부산서 태어나서 잠시 역마살로 돌아 댕기다 다시 돌아와 사는데도 시내 거리는 거의 대학 초기에 끄넜덩거 가타예^^ 이유는 엄꼬 지가 노는 데가 주로 서면여서 그랫는지...몇 년 전에 아이들 구경시켜 준다고 밤에 함 갔었지예...그리고 아아주 가끔 아이들 헌 책 구입 땀시 보수동 살짝 스쳐가고.... 솔직히 시내란 곳은 일부러 놀러 가려고 하는 것 아닌 차 가지고 업무로 가는 경우는 제대로 몬 보지예...류 쌤이 저보다 훨씬 낳네예 이참에 부산홍보대사로...^^;; 귀한 사진 잘 보았슴미더...역시 멋쟁이셔... 08.06.20 09:50

류창희- 김병기 선생님은 '서면' 세대, 저희집 아이들은 '광안리세대' 요즘은 '해운대세대' 노는 물이 다르지요. 저희 남편도 서면세대입니다. 아버님들 세대는 '광복동세대' 그분들은 어려웠던 '피난민세대'들이죠^^* 08.06.24 18:05

류영하- 20대중반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 다녀오고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별반 가보고 싶지 않더라고요.자갈치시장의 습한 공기와 냄새가 싫었던 모양입니다.친정아버지 술 드시면 부산피난가서 천막학교에서 공부하신 이야기며 뭐.그리 명쾌한 분위기가 아니여서 그런가봐요. 이제는 저도 변하고 도시도 변하였으니 마음먹고 찾아가보아야겠어요. 08.06.20 10:37

류창희- 천막학교 이야기 하시는 분들은 우리나라 가장 엘리트라고 알고 있어요. 그분들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선진조국으로 이끌어주셨죠. 부산은 아주 역동적이지요. 도시와 바다와 파도를 닮은 사람들의 생활, 조금은 투박해도 전 부산 남자들 좋아한답니다. 남편과 두 아들. 꼼짝없이 뿌리 내렸지요^^* 08.06.24 07:52

돈오(이재선)- 님을 에세이스트 부산 특파원 겸 리포터로 임명합니다. 김종완 쌤의 마음을 추측으로 대신하여...^^* 08.06.20 12:34

류창희 -부산에 대한 한 50년 전의 오래된 향수를 가지신 분들이 찾고 싶어하는 길목들이라, 저희도 익숙하지 않아요. 주차하기도 어렵고, 일부러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발품팔아야 하는 어른들 추억속의 장소, 아직도 북적여요. 08.06.24 07:56

정승미- 반나절 동안 발품 파신 덕에 에세이스트 동네 사람들 구경 한번 잘했습니다. 부산은..고2 겨울방학 시작하던날 친구랑 둘이서 밤기차를 타고 처음 가봤습니다..그리고 그후에도 기차를 타고 몇번...무궁화를 토요일밤9시쯤 타면 일요일 새벽 6시엔가 도착했던거 같습니다..하루종일 실컷 해운대.태종대 싸돌아다니다 일요일밤 9시에 출발하면 월요일새벽6시 도착 그리고 바로 출근..많은 추억이 묻어있는 곳입니다... 08.06.20 14:05

김병기- 똑 가튼 밤 침대차를 애용했는데도 목적은 완연히 다르군여^^ 히 홀홀단신 서울 생활 할 때 처메는 낮 차 타다 운이 없능거 가타서(이뿐 여자 여페 같이 가길 기대했었는데 괴로운 파트너만 걸려서리 아예 포기하고 ...) 침대차를 즐겨 이용했져. 처음 설 갔을 때 새벽에 갈 대가 엄서서 청량리의 어느 다방에서 코피 한 잔 시켜 노코 추위에 떨며 잠시 날이 밝은 때 까지 졸았던 기억....참 이뿐 승미씨가 침대차를 이용하니 내 옆에 이뿐 아가씨가 앉을 턱이 있나 ^^'''' 08.06.23 14:38

류창희- 승미선생님도 철도에 돈 많이 깔았구나. 호호. 저도 7년동안 연애하면서 비들기호 무궁화호 새마을호.... 처음에 연애할때 완행열차 12시간 걸렸는데.... 지금 KTX 2시간 30분 걸려요. 일일 생활권이지요. 편리함은 있는데요. 담배연기 신문지깔고 퍼대앉는 것. 사이다 계란장수 기타소리 간이역... 운치는 많이 없어요. 그래도 기차탈때마다 설렘의 감정은 늙지를 않아요. 철없죠? 08.06.24 08:02

류창희- 김병기 선생님! 청량리 역옆에는 '장미다방' 이었던 것 같은데.... 08.06.24 08:04

정승미 -지금은 시간이 많이 걸리면 아까운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오래오래 가는 그 시간도 너무 즐겁고 소중했었어요. 그래서 완행열차를 자주 애용했었는데...기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옆에 앉아갈 사람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을 주지요...특히 강촌 가는 기차는 신문지를 안 깔아도 털퍼덕 앉아서 처음 만난 그대들과 함께 노래하며 어울릴 수 있었던 최고의 까페였어요^^ 저 아직 ktx 타 본 적 없는데...기차 여행이 땡기네요...갑자기~ 08.06.24 09:45

류창희- 승미선생님 정말 '강촌가는 기차' <에세이스트 까페> 만큼은 아니더라도 대단했지요. 기차에서 내려 강을 건널 때 너무 좋죠. 가평도 좋고, 청평도 좋고, 대성리도 좋고, 저는 걸스카웃트라 마석 캠프장 참 많이 갔어요. 물론 춘천도 좋았구요. 특히 강촌에는 야외미팅하러 많이 갔었는데.... 차안에서 누가 기타치고 노래하면, 한칸 전체 젊은 사람들이 같이 노래했어요. "토요일밤 토요일 밤에~"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 08.06.24 17:57

정호경- 1951,2년 부산 돗떼기시장에서 염색한 미군군복을 사 입고, 동대신동의 천막친 피난대학에서 곰부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 무렵에 유행했던 대중가요 '물방아 도는 유래'를 들으려고 하루에 몇 번씩이나 다방을 들락거렸지요. 또한 그 무렵에 발표한 김동리의 단편 <蜜茶苑時代>, <興南撤收> 그리고 안수길의 <第三人間型> 등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적십니다. 6.25와 포성과 부산항과 뱃고동 소리는 나에게 여원한 흑백사진으로 남을 것입니다. 류창희님, 그런 부산을 다시 그림으로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08.06.21 22:05

류창희- '영원한 흑백사진' 사진첩 속에 있지요. 저는 행사때 손광성 선생님을 뵈면, 눈시울 촉촉해지시며, 염색한 미군군복 말씀을 꼭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40계단이 있었는데..." 같은 학교 출신들의 공감대인 것 같아요. 그때 선생님들이 계셔서 한국의 문화도 수필가들도 왕성한 주역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부산에 계셨던 것 고맙습니다^^* 08.06.24 08:11

황귀자 -부산을 떠난지가 하 오랜 세월이 되어 낯설기만 하네요.그저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 하던 나이에 떠났기에 지금쯤은 많이 변했을 것같아요. 부산은 류선생님이 지키시겠다기에 안심하고 서울에 눌러 앉아 있답니다. 부산 잘 지켜주이소.-_-;; 08.06.24 06:48

류창희- 제가 지키겠다고 큰소리 빵빵 쳐놓고, 제 가정도 못지키고 자꾸 돌아다니니... 제가 성장한 서울도 늘 가고 싶지요.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주 가는데, 볼일 보고 돌와와 부산역에 내릴 때, 공기가 따뜻하고 온 몸 근육의 긴장이 풀어지며 편안해지는 거에요. 그럴 때마다, 아~ 나는 이제 '부산사람이로구나' 실감한답니다. 08.06.24 08:15

김범송- 부산에 연고가 없어서인지 한번도 못가봤지요. 부산 이야기를 들으면 그 곳이 가고싶었지요. 사진을 보니 올 안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경 잘 했습니다. 모델이 예뻐서 더욱~ 08.06.24 10:25

류창희- 촌 사람들이 서울 못 가본거나, 서울 사람들이 부산 못와 본거나, 촌스럽기는 마찬가지죠. 여행은 연고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여기 소개된 곳은 어른들 장소고요. 태종대 해운대 바다 파도 불꽃축제 모래축제 달맞이 언덕 .... 오죽하면 부산서 뼈를 묻을 생각을 하겠어요. 당연히 오셔야합니다. 환영^^* 환영^^* 부산 08.06.24 18:03


무엇 부터 버릴까?
부득이거(不得已去)

子貢이 問政한대 子曰 足食足兵이면 民이 信之矣리라

子貢이 曰必不得已而去인댄 於斯三者에 何先리잇고 曰 去兵이니라

子貢이 曰 必不得已而去인댄 於斯二者에 何先이리잇고 曰 去食이니
自古로 皆有死어니와 民無信不立이니라



자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었는데,
공자가 대답하기를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병력을 풍족하게 하면
국민들의 믿음이 깊어질것이라 했습니다.

자공이 말하기를
반드시 부득이 해서 버려야 된다면
이 세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공자는 병력을 버리라고 합니다.

자공이 또 묻습니다.
그래도 또 반드시 부득이해서 버려야 된다면
두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고 ...
양식을 버리라고 합니다.

공자는 예로부터
차라리 굶어서 죽을지언정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논어> 안연편 7장 내용입니다.

전 매일 신문, 라디오, TV를 보고...
행동대원이 되지못하고
그냥 구경하는 족속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2천5백년 전
춘추전국시대나
오늘 아침
뉴스나 같다는 이야기지요.
문명의 최첨단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사는 모습입니다.

새정부 출범 100일 남짓
축하하는 붉은 장미 100송이 대신
붉은 촛불을 켜들고 거리로 나섭니다.
제몸을 태우는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따뜻한 빛이라면 좋으련만,

즐기는 이들의 또 다른
문화축제로도 비춰 보입니다.
거리로 나갈 용기가 없어서 인지요.
아님,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건지요.
경각심 충분히 자리 잡았으리라 믿습니다.
서로서로 믿고 지켜봐 주었음 좋겠습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풍요로운 삶, 국가의 안보, 국민들의 화합.
세가지 다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집단 이기를 위한 희생이 아니기를
빌어봅니다.



이태리 <오드리 방>에 들어가
<촛불 든 사람들>을 읽고 리플달다가 올립니다.
6월 9일


매주 금요일 저녘이면
아버님과 식사를 한다.

형님댁에서 생활하시는
아버님은
"네가 끓인 된장이 맛있다"고 하시는데,

나는 되도록
굴뚝에 연기 안 피우고
밖으로 나가 먹고싶다.

핑계삼아 외식하고
바람쐬고 산책하고 싶다.




청국장에 파전 한접시 먹고


송정 바닷가에 나와
죽도 섬앞에서 아버님과 남편과 작은 아들과
3대의 남자들이
화장실 같이 가는 모습도 보기 좋다.

나는 무엇보다
집에서 설거지 안해서 좋고....

분홍빛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바닷바람 너무 쎄게 분다.



아버님 앞에서
까불기만 하는
한량 며느리


바람쐬고 돌아온다.
무우영귀(舞雩詠歸)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항상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말하는 제자들에게

만약, 세상이 너희들을 알아모신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자로, 공서화, 염유는
각자의 포부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겸손한 척 요것만 하겠다고 말한 내용은
제후, 대부, 집례자
(지금으로 보자면 국무총리 국회위원 문화부 장관 등)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들을 늘어놓았다.

뒤에서 한가하게 거문고를 뜯고 있던 증자가
공자에게 <舞雩詠歸> '무우영귀' 하고 싶다고 말한다.

'늦은 봄날에 나드리 봄옷이 마련되거든
冠者과 童子와
沂水에서 목욕하고
舞雩에서 바람쐬며
詩歌를 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와 며느리와
밖에서 식사하고
바람 쐬고
일상을 노래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樂'
오래 오래 누리고 싶다.

6월 6일 금요일 송정 바닷가에서



에세이스트 댓글

권혜선- 류창희 선생님 바람불어 머리카락 휘날리는데도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아버님 표정이 참 행복해보입니다. 08.06.17 10:49

류창희 -저희 아버님은 뭐만 물어부면 맨날 신이나서 답변해 주시고 행복해 하세요. 이것 저것 막 물어보죠^^* 어르신들이 이야기 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니... 08.06.17 16:50


정승미- 시아버님 옆에서 그렇게 귀엽게 앙증스럽게 활짝 웃으시는 선생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활짝피게 합니다. 아~나도 저렇게 웃어야지~~~고맙습니다^^ 08.06.17 10:53

류창희 -무조건 푼수가 되는 거죠. "저 이쁘죠?" 할 수 없이, "그래 이쁘다" "어머님 보다요?" "니 어머님 쫓아갈 사람은 없다" "다음 달 제사인데 진지잡수러 오시면 물어봐야지" 08.06.17 16:53

안동댁- 류창희 선생님의 살인 미소 넘 보기 좋아요. 일주일에 한번 식사 대접 할 수 있는 아버님이 계신다는 사실, 부럽네요. 08.06.17 14:29

류창희 -맞아요. 이번주는 메뉴를 무엇으로 할까. 아버님 핑계잡고 밥 안하려고.... 주로 저 먹고 싶은 걸로 하죠. 정작 아버님은 우리들 만나는 기쁨에 메뉴따윈 신경 안 쓰시거든요. 08.06.17 16:58

한상용- 아직 얼굴이 곱습니다. "아직" 이라는 말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ㅎㅎ 08.06.17 17:05

류창희- 글쎄~ 저도 나이값을 하고 싶은데, 안 늙어져서.... 철이 없으면 안 늙어져요^^* 철없는 '흰머리 소녀' 08.06.17 17:18

아쿠아- 정말 보기 좋습니다. 달맞이 고개를 넘어서 간 송정 바닷가의 모습이군요. 아버님도 남편분도 선생님도 아들도 모두가 행복해 보여 정말 보기 좋습니다. 08.06.17 18:43

류창희 달맞이 고개를 넘어서 간 송정 바닷가 맞습니다. 해운대나 광안리보다는 바닷가 풍경이 소박하지요. 파도는 훨씬 힘차답니다^^* 08.06.18 15:20

전해주 -어느날 아버님 카페 들어오셔서 우리들에게 하소연 하시기를 며느리와 아들이 내맘 알아주지 않는 다고 ..우리는 그들이 아버님을 알아 모신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물어 보았다. 며느리와 아들이 누리는 락을 누리고 싶다고. 일상을 노래하고 싶으시다고... 08.06.17 20:04

류창희- 아버님은 아버님의 아버님을 뵌적이 없으시답니다. 외동이신 아버님은 혼자 거을을 보시면서, 우리 아버님도 나를 닮았겠지 미루어짐작해 보시면서 아버님을 회상하신답니다. 08.06.18 15:24

황귀자 -" 아들 손자 며느리랑 식사하고 바람쐬고 일상을 노래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락 오래오래 누리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바라는 소박한 꿈이지요. 참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막내딸 같은 류선생님, 가족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08.06.17 20:23

류창희 -막내동서가 훨씬 딸답습니다. 하얗고 길다랗고 ... 겉모습 뿐만 아니라, 근데 저처럼 막 까불지는 않지요. 철 없지요? 황귀자 선생님^^* 08.06.18 15:26

김지영- 아버님이 참 좋으시겠어요. 착하고 예쁜 며느리를 두어서. 아버님 모습을 뵈니 신랑이 참 미남이실것 같습니다. 08.06.17 21:24

류창희 ㅎㅎ 지영선생님 보다 키도 작고, 지영선생님보다 꽃미남도 아니고, 그저 부창부수 ^^* 08.06.18 15:28

김미정- 예뻐요. 류선생님. 08.06.18 00:34

류창희 -미정선생님 만큼은 아니지요. 잘 지내시지요? 08.06.18 15:30

강병기- 어릴 때 나는 형과 함께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이후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류창희님의 무우영귀 정말 부럽습니다. 아버지 뒤에서 팔자걸음으로 걷고 있는 저 사람이 제 고등학교 2년 후배입니다. 참 부러운 사람입니다. 08.06.18 15:54

류창희 -팔자걸음 저 남학생^^* 참 건방지네요. 어찌 강병기 선배님보다 '속알머리' 더 훤하니... ㅋㅋ 남학생여러분! 머리 숱 관리 잘하세요. 자존심문제랍니다.^^* 08.06.18 16:52


어느날
옥황상제가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소원남 1 :  저는 큰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옥황상제 : 그래 접수했다.
               나가 보아라.

소원남 2 :  저는 큰 벼슬을 하고 싶습니다.
옥황상졔 : 그래 접수 되었다.
                나가 보아라.

옥황상제 : 그래 너는 소원이 무엇이더냐?
소원남 3 : 저는 돈도 벼슬도 큰 욕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산좋고 물좋은 곳에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새끼들과
              오손도손 살고 싶습니다."

옥황상제 : "떼끼! 이놈아
              그렇게 좋은 것이 있으면
              내가 하겠다"

             평범하게 범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은 일인가.



처음에는 만남의 반가움에


"예쁘게 예쁘게 찍어"
마냥 소녀같다.



한 여름 오기 전에
미루지 말고^^*
차 한잔 핑계삼아^^*
찾아뵙고 싶다.






10여년 전,
동서들과 시어머님을 모시고
박정자 고두심 윤석화가 공연하는
<신의 아그네스>를 보러 갔었다.
그날도 오늘 처럼
수녀님이 앞에 계셨다.

내가 반갑게 인사를 하니
어머님이 아는 사람이냐고 물으셨다.
우리 여학교때
수녀님의 시집<민들레의 영토>를
읽으면서 자랐다고 했다.

절에서 '꽃보살'이신 어머님은
앞으로 절대로
수녀들과 친하지 말라고 못 박으셨다.

연극을 보고 나오시면서
아그네스가 임신한 부분만 꼬집어
'쯔쯧! 수녀가 애를 배다니...'
몹씨 언짢아 하셨다.
아마도,
혹시라도
며느리를 카톨릭에 빼앗기면 어쩌나
걱정하셨었나보다.

남편과 나는 '외인'으로
ME모임에는 갔었지만
아직
신자는 아니다.

5년 전쯤,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있는
<김성동 추리문학관>에서
문학강연이 있었다.

그날,
검은색 망또를 입으셨는데 아주 고왔다.
참 예쁘다고 하니

"사람들이 나보고 '이영애'를 닮았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영애가 '이해인 수녀'를 닮았다.

올 신춘에
내책<<매실의 초례청>>을 보내드렸다.

알록달록
파란 나비, 빨강꽃, 노랑꽃, 보라꽃, 분홍꽃.
색연필로 줄쳐진 카드편지에는
수녀님 흑백사진 한장과 더불어

'제 모친이 돌아가신(07.9.8) 여동생 집이 길음동이라,
그 동네 이야기를 더욱 따뜻하고 정겹게 읽었습니다.
불쑥 전화 걸기 보다는 카드 한장이 더 소박할것 같아 ...'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책과 같이 보내주셨다.

수녀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산책삼아 <해인 글방>에 차 한잔 하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차일피일 미루다
벌써 몇달이 지났는데,

오늘 딱 걸렸다.

"오늘이 생일이라 냉면 한그릇이 먹고싶어서..."
"저는 퇴근하는데, 냉면 먹으면 힘이 날것 같아서..."
(유월이 생일인 사람들은 이때쯤 되면 매운 맛이 끌리는가 보다 )

차 한잔 마시러 안오면
"내가 류선생 논어강의 들으러 갈까요?"

주섬주섬 가방속에서 책한권 꺼내 건네며
"내가 번역한거야"
<<우리 가족 최고의 식사>>
흰손수건 꺼내 입가리며 수줍게 웃으신다.

해맑은 미소에서
어느덧
세월이 겹쳐보인다.

6월 4일 수요일



류창희   2008-07-24 08:01:45
2008년 7월 15일자 받은 메일

해인 수녀님을 위해서 많은기도 부탁드립니다.

수녀님께서 어제 대수술을 하시고
지금 투병중에 계십니다.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시네요.

마음을 모아
해인 수녀님의 빠른 쾌유를 위해서
한마음으로 기도해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해인 수녀님..
어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셔야지요

모듬피클 장아찌

1.재료

오이15개 (굵은 소금 듬뿍 뿌려 이틀정도 쪼글쪼글 하도록 절임)

총각무 1단 (껍질 까서 무만 사용-무 절대 절이지 않는다)
양파 4~5개
마늘 쫑 1단
깐 마늘 한웅큼
청.홍고추 매운 것 적당량

* 위 재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적당하게 썰어
아예 보관 할 그릇에 담아놓는다.


2. 재료
간장 (청정원 햇살조림 간장) 1.8리터
식초 (오뚜기 사과식초 1.2리터)
설탕 1.5kg

3. 2번 재료를 함께 혼합해서 슬쩍 끓인다.
1번 재료위에 뜨거운 것을 그대로 붓는다.

★ 부울 때 1번 재료가 혹시 깜짝 놀라거나 화상을 입을지 모르니,
누름 접시 같은 것을 올려놓고 접시위에 살살 붓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면 더 맛이 있을라나…

꼭 눌러 열흘정도 지나 오이를 먹어봐서 ‘새콤달콤’익었으면
냉장 보관하시고 두고두고 일년 내내 먹으면 된다.
이때 양이 좀 많다 싶으면 이웃이나 친지들과 나눠먹으면
훨씬 삶이 풍요로울 수 있다.      




* 눈 빠지게 비율 기다린다고 핸드폰 문자 보내신 분,
그날 설명은 잘 들으셨죠
새콤달콤 맛있게 담궈
가족과 함께 건강한 여름 되세요.        


그는 <내가 엄마인줄....>

2박3일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매일 먹는 약도 먹지 않았다.
매주 가는 산에도 가지 않았다.
왜냐구 물으니,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저녘마다 전화해서
그립다고 했다.
그렇다!  
그는 내가 옆에 손잡고 있어도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나는, 틈날 때마다
조목조목 일러준다.

이다음에 나 없어도
매일 씻고
매일 수염 깎고
짠 음식 먹지 말고…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게.
걱정 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알았다’고 말하지 말고
'오래 오래 같이 살자' 고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아침마다
'멋있다' 안아주며 등 두들겨주다가
수틀려 “다녀와요” 그냥 내보내면
서너번 들락날락
핸드폰 찾고
차열쇠 찾고
서류봉투 찾고 ...
그래도 모르는 체 하면
슬며시 기죽어 나간다.

얼른 뒷 베란다로 나가
현관 쪽 내려다보면
ㄴ자로 얼굴 쳐들어
자꾸 22층 올려다본다.
그래도 창문열고 안내다 보면
축 쳐진 어깨로
터벅터벅 발걸음 무겁다.

“에이구~ 내가졌다.”

창문 열어 ㄱ자로 내려다보며
손까지 흔들어주면
곧바로 ‘속알머리’보이며
군대사열 받듯
힘차게 팔 휘저으며
중앙공원 빠져나간다.

그는, 내가 자기 엄마인줄 안다.
갔다오면 업어줘야지.



5월 31일 토요일 삼식이 세끼 하던 날^^*
(본인이 퇴근해서 말하기를 '삼식이 쉐키' 돌아왔다고 했다.)

일식씨 - 하루에 집에서 한끼 먹는 사람
두식이
삼식 세끼
영식님 - 집에서 한끼도 안 먹는 남편


우아미   2008-07-09 13:38:41
어느 집 아들이 자기 엄마한테, 왜 아빠랑 자기랑 사람 차별하느냐고 따지더래.
반찬도 맛있는 거 항상 아빠한테 더 주고, 뭐든 아빠를 더 챙겨주고..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이 엄마가 한다는 말, '너는 내 아들이지만, 아빠는 남의 아들이잖니' 그랬데.
창희씨 같은 사람이나 이 집 엄마 같은 사람 하고 사는 남자는 참 행복하겠다.
류창희   2008-07-09 14:10:48
'우아미' 당신!
우아하고
아름답고
미인인 당신은

'소세지' 인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적인
안과 밖이 소인인 나의 심정을 몰라.

소인국 사람들
손 발이 바쁘거든.
그래도 맨날 제자리^^*

뛰어봤자 벼룩!


수요일 또 비가 온다.
오전 오후 수업이 꽉찬 수요일
수요일만 잘 넘기면 일주일이
그대로 또 지나간다.

출근하는 아침은 5분이 바쁘다.
아유~
나도 바빠 죽겠는데
내 짝지 비를 핑계삼아 출근시켜 달라는 눈치다.
어쩌겠는가.
비가오니.

오후에 수업 할곳으로 옮겨가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와이퍼를 바쁘게 움직여도 앞이 잘 안 보인다.

폭우 속에
식사하고 서면길을 걷는데,
하이힐 신은 발이 첨벙첨벙 물에 잠긴다.
우산을 써도 시원치 않은데
지나가는 차가 끼얹는 물을
우산으로 막는다.
구두속에 물이 꿀쩍꿀쩍 하더니
확 벗겨진다.

순간! 난 신바람이 났다.

30여년 전
명동 케리부룩에서
거금을 주고 구두 한켤레를 샀다.
무슨 일이었는지 퇴계로2가 육교를 건너
친구 희정이와 남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남산골 샌님들이 살았었다는
한옥마을을 지나는데
천둥번개를 치며 비가 쏟아졌다.
금새 물이 불어 기와집 골목길에
개울물처럼 세차게 흘렀다.
종이백이 찢어지면서
구두 한짝이 막 떠내려간다.

쫓아가 잡아야 하는데
처음에는 허둥대다
춤추듯 떠내려가는 구두의 꼬락서니에
갑짜기 웃음보가 터졌다.

배꼽을 잡고 죽는다고 웃었는데.
빗소리에
물내려가는 소리에
웃음소리 파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늘도 땅도 듣지 못했다.

근데,
오늘 30여년 전의
까르르 까르르 ... ...
깔깔 대던 웃음소리
첨벙대는 내 발속에서 들린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책상밑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맨발들로 앉아있다.
물에 빠진 생쥐꼬라지로 막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사람들 또 까르르 깔깔 ... ...


5월 28일


(지난 일요일 오랫만에 서울역에서 희정이를 만나
밥먹고 차마시면서 몇시간 동안  
흰머리 누가 더 많이 났나 자랑했다 )
빙호 님이 남기신 글

가상공간에 축조한 외딴 집 한 채!
단아한 한옥의 이미지로 다가섭니다.
그 집은 호들갑스럽거나 야단스럽지 않은
전통을 고수하는 장인의 예술가적 안목과  
현대적 감각을 살리면서 파격의 멋을 창출한
간소하면서도 질박한 아름다움이 깃든 공간입니다.
일백여 칸칸마다 능숙한 솜씨로 빚어 놓은 쓰임새는
옛 정취로 살아숨쉬고,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주인장의 식견이
문장마다 기둥마다 그대로 드러나 살뜰합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던 조급한 마음이 불쑥 대문을 열고
마른  목을 축일 한 잔의 물과 잠자리를 청해도 좋을
걸터앉은 툇마루는 아늑하고 편안합니다.
나날이 번창하여 가문을 빛나게 하소서





제일 먼저
관심가져주시고 챙겨주셔서
든든한 벗입니다.

무슨 말을 다 해도
다 들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우리 지금처럼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밥먹고 차 마시고
그리고
무슨 말이든 다 하고 살아요.

물금

기차를 탄다.
기차라는 단어에는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다.
속도감도 있고 숨고름도 있다.

탈때마다
설레인다.

경부선
값을 몇천원 더 치는 한이 있어도
순방향 C,D 창가쪽을 택한다.

창가에 앉으면
상행선
구포와 밀양사이
'물금'이라는 곳을 지난다.

한번도 내려본 적이 없는 물금
언젠가 꼭한번 내려 보고 싶은
물 금 물 금 물 금
물을 머금고 있다.

누군가
여강이나 푸른 도나우강을 이야기 하면
난 금새 물금이 떠오른다.

그곳에
가랑머리 소녀를 위해
강바람을 모아모아
휘파람을 불어주던
키큰 소년이 서 있을 것만 같은
물금이 좋다.

하행선
밀양에서 구포사이
뉘엿뉘엿
수면으로 해가 비치면
오래도록 바라본다
황혼의 시간을.

오늘 도
그는
사흘만의 해후이건만
봄바람에 꽃구경 갔다가
낙엽따라 돌아오는
연인을 맞이하듯

흰 머리카락 휘날리며
종착역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저녘밥을 사준다는 핑계로

물금이 점점 멀어진다.
부산역 도착
물덤벙이나 먹으러 갈까.


08. 05. 25. 2박3일 서울에 다녀오면서



곽인수   2008-08-02 09:29:45
중학교떄 물금에서 통학하던 친구가있었죠. 가끔 친한 친구들과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부산진역에서 비둘기호열차를타고 공식적인 외박을 했답니다.
가촌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논둑에서 네잎클로버 찾고, 춘추원이란 자그만 공원, 춘추원옆으로 흐르던 강엔 여름이면 어린아이들이 팬티만 입고 더위를 달래던 모습, 밤하늘 보며 사춘기의 아름다운 꿈과 고민을 나누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가끔 기차를 타고 지나칠떄면 내려서 역에서 친구집까지 걷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네요.
며칠째 바람한 점 없이 덥기만 하더니 어제 오늘 살랑살랑 살갗에 부딪히는 바람이 사랑스럽네요.
더위에 건강조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요.
류창희   2008-08-03 09:49:01
비들기호를 타고 외박하던 소녀들
어느덧 세월이 쏜 화살되어...
네잎클로버를 찾는 소녀에
찾았다고 까르르 웃어대는 소녀들

여름 한 가운데서 감기와 몸살과 설사와
더불어 땀 흘리고 있습니다.

물금역 부근의 소녀들을 상상하면서....
강변학생   2008-08-19 19:17:37
철마와 함께 한세월 보냈담니다
물금은 부산의 변방에 있는 간이역이지요
먼 옛날 그옛날엔 낙동강의 일급수에서 자란 잉어의 그맛
옆 사람이 없어져도 모를만큼 맛이 좋았습니다
모두 옛날의 이야기군요
선생님이 한번도 내려보지 않은 물금역에 말미가 있고
좋으시다면 안내하여 방문함도 좋으련만,,, ?
찧는듯한 무더위 보내시너라 한여름 고생 만으셨겠군요
가을과 함께 서당 문도 열리오니 그때 뵈옵기를 바라며
08, 8, 19,
류창희   2008-08-27 17:01:18
물금물금
물이 차오르듯
그리움이 차 오른답니다

오르지 물금역을 지나며
바라보는
물빛이 좋아
상행선 하행선을 물쪽으로 앉는답니다

기차여행이 주는 보너스입니다
기차는 여럿이 보다 들이
둘이 보다 혼자 타야 운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또 타고 싶습니다.